지구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죽던 시대였다. 대학생이던 아버지가 남양군도(南洋群島 : 남태평양의 섬들)로 미군과 싸우러 갔다. 경기도 안성 농가 뒤란 감나무 아래 장독대-. 할머니는 매일 밤 정안수를 떠놓고 빌었다. 감나무 신빨은 대단했다. 일본이 망하고 아버지는 돌아왔다. 해방 되며 삼팔선이 생겼다. 전쟁이 터졌다. 왜란(倭亂)이나 호란(胡亂)이 아니었다. 적은 왜놈이나 오랑캐가 아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할머니는 다시 감나무 아래 정안수를 떠놓고 빌었다. 유엔군의 효과적인 방어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쫓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북진하던 병사가 집에 들렀다. 병사는 “소대장님이 8월 25일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라고 짧게 전하고 대열로 돌아갔다. 삼팔선이 터진 지 두 달,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작은 아버지는 꽃 같이 별 같이 스러졌다. 네 살, 두 살 난 딸 둘을 남기고-. 감나무 신빨이 떨어진 것이다.

엄마 바로 아래 동생 정희 이모는 약혼자를 따라 북으로 갔다. 도중 파주(坡州) 외가에 들렀다. 북진하는 유엔군의 포성이 가까워 오자 밥을 먹다말고 급히 나갔다. 잠시 후, 미군의 폭격음이 들렸다. 후에 이모는 북한의 유명 배우가 되었고, 이모부는…. 그러나 이는 영화가 아니다. 전쟁은 현실이었다. 외가에서는 저간의 상황을 분석, 이때 이들이 함께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 바로 아래 동생, 그러니까 배재고등학교를 다니던 큰 외삼촌은 저물녘 길을 가다가 트럭에 실려 전선에 투입되었다. ‘횡성의 비극’(1951년 2월 11~13일, 중공군에게 포위돼 국군과 유엔군이 몰살당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포탄이 터진 것이다. 한밤중에 피를 흘리며 눈 쌓인 고지를 내려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쏘았다. 삼팔선 인근 추곡 고개마루에 살던 김상기 어른은 인민군에게 총을 쏘다가 국군에게 쏘고 다시 인민군을 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군인들이 쏘라는 쪽으로 쏘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도망쳤다. 다시 군인들에게 잡혀 그들이 쏘라는 쪽으로 쏘았다. 군인들은 “누가 적을 도왔는가?”라고 묻고, 개똥엄마 손가락 방향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왼눈이 오른 눈을 찌르고, 꽃이 나비를 쏘고, 버드나무가 멧새를 죽였다. 건넌방이 안방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우물은 부엌에게 총질을 했다. 지붕은 기둥을 부수었다. 막내가 총을 쏘았다. 형에게, 누나에게, 아버지에게 쏘았다. 아버지는 쏘지 못했다. 자식을 쏠 아비는 없다.

‘9·28 수복’(서울 탈환) 직후, 유호와 박시춘이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다. 이들은 바로 노래를 만든다. 박시춘은 육군 군예대 제2중대 책임자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고지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유호 사/ 박시춘 곡/ 현인 노래)

이 노래는 ‘적을 무찌르자’는 군가와 달리 덧없는 죽음을 노래한다. 군가가 아니라 진중가요(陣中歌謠)로 분류된다. 국군은 서울수복 이후 압록강 진군 때까지만 이 노래를 불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한다. 1.4후퇴다.

 

김진묵 (음악평론가)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