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멎었다. 아직 바람은 매서우나 끝임 없이 흩날리다 부서지곤 한다. 부서지고 끝없이 휘날리는 것, 온기와 냉기가 뒤엉켜 나뒹구는 것, 비에 눈발이 섞이고 진창이 되어버린 대지가 봄이다. 봄은 따스하지 않다. 뒤엉킨 계절, 뒤바뀌는 순환의 엇갈림 속에서 생명은 고통을 호소한다. 3월은 그래서 모두에게 시작이자 아픔이며, 병치레의 계절로 온다.

병은 나의 몸이 외부의 변화에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알리는 지표이자, 변화에 극렬히 저항하는 나의 비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3월이면 콧물을 질척이거나 두통을 감수하거나 삐거덕거리는 사지를 짊어지듯 부여잡고 일터로, 학교로 향하는 것이다. 시인 류시화는 말했다. “슬픔이 깊으면 모든 동작이 다 울음이 된다.” 처연한 말이다. 존재에게 슬픔이 깃들면, 그리고 그 슬픔이 오로지 슬픔이라면 그의 걸음걸이, 숨소리, 어투나 표정 모두에서 슬픔이 울음처럼 뚝뚝 떨어져 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슬픔의 진정성이란 슬픔의 당위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실은 이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 자체에 있으며, 온 몸에 깃들인 슬픔이 터져버렸다는 이유만큼만 진실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울었는가는 그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다. 그와 나의 아픔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거짓 슬픔이란 없으며, 모든 변화란 아픔일 뿐이다.

그런데, 아픔엔 효용이 있다. 아픔은 나를 점유하고 있는 힘들의 근원을 감지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단서이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나의 몸 상태, 기억, 습관, 학습된 가치들이 서로 아웅다웅 힘겨루기를 한 결과가 만들어내는 현재에 대한 해석이며, 그래서 시시각각 변하고,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이며 심리적인 것이라기보다 물리적이다. 그 힘들의 배치가 곧 감정이고 아픔이며 병이다. 누구도 그 힘의 배치를 바꾸지 않고서 아픔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린 병으로부터 내가 아닌 타자를 읽으려 한다. 너로 인해 내가 아픈 것이라고 믿는다. 잘 지켜냈다면 건강을 잃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믿는다.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언젠간 나를 알아줄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그것이 미망인 이유는 나의 아픔이란 타자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점유하고 있는 힘의 배치를 바꿔내 이 봄을 넘어설 수 있을까? 과학철학자 파이어 아벤트는 “선입견은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조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조는 기존 이론과 대안이론을 필요로 하는데, 대안이론보다 훨씬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기존 이론, 즉 현재의 ‘나’이다. 우리들이 ‘실재하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관찰과 증거, 즉 분석의 자료들은 기존 세계관이라는, 혹은 습관이라는 익숙한 상황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이 가려지고 선택된다. 내 고통의 가장 중요한 판단 근거와 자료들이 실은 나의 병을 감추는 오염원이 되는 순간은 내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파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변화에는 대조가 필요하다. 새로운 나를 새우려면 우선 기존의 나를 명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찌하다 보니, 나이를 먹어서, 시간이 지나니까 변화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변화란 겨울에서 봄으로의 전환처럼 획기적이며 강렬한 고통을 태생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봄을 맞으려거든 우선 기존의 나를 규정하라. 그래야 다른 나와의 대조가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겪는 3월의 아픔은 그러한 대조를 통해 탄생한 아픔에 다름 아니다. 봄은 결코 따스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 창을 열고 변화를 호흡할 때임을 이 아픈 봄은 말한다.

신수동 (인문서당 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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