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리준, 웨민준, 장샤오강, 왕광이 등 1990년대 이후 중국 현대미술에서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내는 인물 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장샤오강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58년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태어난 그의 작업은 격동의 시대를 산 중국인과 중국사회의 자화상이면서 이들이 굴곡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터득한 철학적 사유를 드러내 보인다. 오랜 사회주의의 장막을 걷어내고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는 중국에서 사회 전체의 모습보다 개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그의 작품은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국제 미술시장에도 커다란 이슈를 낳으며 주목 받는다.

장샤오강, 혈연-대가족 No.1(1994)

장샤오강은 1980년대 중국 미술계의 주류였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을 거슬러 서구 모더니즘의 전위성을 수용했던 작가다. 그는 1960~70년대에 걸친 문화혁명, 1989년 천안문사태 등 격동의 중국 현대사속 혼란기를 겪으며 슬픔과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인물화 등으로 그려내면서 중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했다. 1990년대 그의 이름을 세계무대에 각인시킨 ‘혈연-대가족’ 시리즈는 격동의 현대사를 지나온 중국인들의 모습을 가족사진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냈다. 그의 가족 시리즈는 홍콩 소더비와 크리스티경매소 등을 통해 연일 100억 원 이상을 호가하며 세계 미술시장에서 최고의 미술품 생산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문화혁명은 그에게 중국이라는 폐쇄된 국가에서의 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가 예술에 대해 공부할 시절엔 중국 밖 세계에 대해 알 수도 없었다. 공산당 이론에 대한 이념교육을 주로 받던 시대였고 처음으로 인상파를 알게 된 것이 대학 2학년이던 21세, 고흐 작품을 처음 본 때가 대학 졸업 후인 24세 때였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서 예술을 탐구하는 과정 속 겪은 모순, 의심, 기쁨 등이 그의 작업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게 된 것이다.

1992년 유럽에서 서양미술에 대해 탐구할 무렵이 그에게는 자아에 대해 성찰하는 시기였고 예술가로서 절망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서양의 화풍만을 따라가는 예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중국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중국은 아주 복잡한 국가였다. 때마침 가게 된 고향 집에서 부모님의 옛 사진을 보고는 중국에 있는 가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느 가정이었지만 국가가 가정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을 사진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그는 혈연-대가족 시리즈를 작업하게 된다. 그는 초기작부터 빛과 얼룩의 표현을 중요하게 여긴다. 빛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라고 믿었고, 얼룩 모양은 시간의 흔적을 표현한다. 이것은 장샤오강의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의 중요한 요소로 고통, 절망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장샤오강은 생명과 시대를 그린다.

 

이구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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