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유일의 음반가게 ‘명곡사’ 36년의 세월, 이석범 사장

한창 새 청사 공사 중인 춘천시청 앞 옛 피카디리극장에서 중앙로 명동거리로 접어드는 골목. 세월의 흐름 아래 옛 시청은 허물어졌고, 아날로그 극장은 간판을 내렸지만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가게가 있다. 춘천 유일의 레코드 가게 ‘명곡사’다. 화창한 봄, 작은 가게 앞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발길을 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가게. 크지 않은 도시에서 그나마 가장 혼잡한 동네에서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는 듯, 혹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관통하는 듯 오롯이 자리했다. 한 달 가량 끈질긴 부탁 끝에 4월이 다가는 어느 날, 이 오래된 가게의 주인공을 만났다.

바닥부터 천정까지 CD·카세트·LP가 빼곡한 좁은 가게 안을 비집고 들어가 앉으니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올리밴더의 지팡이 가게’ 분위기가 난다. ‘미니멀리즘’을 콘셉트로 내세우는 요즘 가게들과는 정반대지만 곳곳에 묻은 세월의 때가 정겹다. 이석범(70) 사장이 명곡사를 차린 건 1981년 3월 24일. 36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총각 시절 오디오 전축사에서 LP와 카세트를 팔던 노하우를 살려 밥벌이를 하려고 차린 가게였다.

“한때 춘천에만 레코드 가게가 열 군데가 넘었어요. 1980년대 LP·카세트를 팔 때는 장사가 아주 잘 됐죠. 그땐 그거 아니면 음악 들을 데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알기론 전국에 레코드 가게만 만 개가 넘었다고 해요. 웬만한 읍에도 몇 개씩은 있었으니까요. 1990년대 CD가 나올 때만 해도 음반시장이 아주 활성화됐었죠. 그런데 MP3가 등장하니 상황이 바뀌었어요. 음원시장이 커지니 이제 음반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죠. 밥벌이가 안 되니까 레코드 팔던 사람들이 다 떠났어요. 안타깝죠.”

 

 

 

 

 

 

함께 장사하던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음에도 명곡사만은 자리를 지켰다. 이 사장의 천직이기도 했지만 춘천사람들과의 약속이라는 생각에서다.

“다 문을 닫고 혼자 남았지만 장사는 더 안 돼요. 돈을 벌려고 했으면 벌써 그만뒀죠. 가게를 계속 지킨 건 제 고집이기도 해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 음악을 파는 게 완전히 삶의 전부가 됐어요. 천직이라고 하는 게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해요. 요즘은 오래오래 장사해 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어르신들은 어렵잖아요. 여기 아니면 음반 살 곳이 없으니까. 그런 분들 보면서 위안을 받아요.”

늘 손님을 첫째로 생각하는 이 사장의 철학 때문인지 명곡사는 쉬는 날이 따로 없다. 명절 같은 아주 특별한 날을 빼놓고는 연중무휴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 문을 닫아 놓으면 얼마나 실망하겠냐는 것.

“쉬지 않고 오래 일하다 보니 뿌듯한 일이 아주 많아요. 음반 하나 사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던 분이 우리 가게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했던 적이 있어요.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하더라고요. 멀리 사는 분이 클래식 음반 사려고 여기까지 왔을 때, 한 번 왔다 가신 분들이 또 찾아올 때 그럴 땐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하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죠. 사실 사업을 하다보면 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저는 그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 사이의 만남은 영원하다고 생각해요.”

한 곳에서 같은 일을 오래 하다 보니 희귀 앨범도, 얼굴이 익은 손님도 많아졌다. 가게 문을 열 때부터 음반사로부터 배급받은 상품들을 쌓아놓다 보니 자연스레 ‘골동품’같은 앨범들을 모으게 됐다. 이 작은 가게에서 미국 힙합의 대부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의 데뷔 앨범 카세트 테이프도 찾을 수 있다니 웃음이 난다. 최근에는 가수 나얼이 명곡사 단골이 됐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장은 가수도, 장르도, 음악도 편 가르고 싶지 않다.

“나얼 그 친구는 아주 순수하고 착하더라고요. 엊그제에도 왔어요. 서울에 살 텐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요?(웃음) 저는 대중가요도 많이 듣습니다. 아이돌 음반이 가장 많이 팔리는 앨범들이기도 하고요. 아이돌 위주 차트 때문에 우리 음악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얘기도 많지만 저는 비판하고 싶지 않아요. 예전엔 음악으로만 승부했다면 요즘엔 보이는 것도 중요해졌는가 보다 해요. 트렌드가 그렇게 변한 것뿐이죠. 중·고생 손님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 앨범을 사가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너무 귀여워요.”

장사를 하며 항상 웃을 일만 있는 건 아니었을 터. 이 사장에게 힘들었던 기억을 물으니 앞에서도 말했던 음반시장의 축소 이야기가 나왔다.

“음악을 듣는 모든 문이 음원 쪽으로 가 있는 게 안타까워요.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건 세월과 유행이 돌고 돈다는 겁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잘 모를 LP가 최근에 다시 회생되고 있기도 해요. 유행이 끝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마니아층을 위해 새로 LP를 찍어내고 있어요. 앞으로 음반시장이 더 활성화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레코드 파는 가게가 최소한 다섯 군데 정도 생겨서 상부상조 했으면 해요.”

서정적인 가사가 아름다운 7080음악, 마니아층이 있는 클래식, 어르신들이 찾는 트로트, 유명하진 않지만 음악성이 좋은 언더 가수들, 올해 데뷔해 최신차트 1위를 차지한 한 힙합가수에 이르기까지. 넓은 폭의 음악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장의 얼굴이 상기됐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 명곡사로 달려가 만원 남짓의 CD 한 장씩을 샀던 기억이 있다고 말하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낯익은 것 같다고도 한다.

“여기까지 온 건 모두 춘천시민들 덕분입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정말 감사해요. 문화도시 춘천에서 음악이 계속 사랑받을 수 있게 항상 노력할 겁니다. 건강이 따라주는 한 최선을 다해서 자리를 지킬 거예요. 사람은 언젠가 떠나기 마련인데, 제가 없더라도 ‘명곡사’라는 이름만은 영원히 남기를 바랍니다.

36년의 세월.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러 오던 중학생이 커서 사장을 인터뷰를 할 정도의 세월. 하나 둘 쌓인 음반은 어느새 가게를 발 디딜 틈 없이 메웠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음악의 편을 가르지 않으며, 손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석범 사장의 FM 마인드가 이 작은 가게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명곡사를 찾아오는 모든 것은 오늘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간다.

 

 

 

용지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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