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고양이가, 다음에는 개가, 너무 많아 갈색이 아닌 개와 고양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법이 생긴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법을 비판하던 《거리일보》가 폐간되더니 결국 정부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기사를 싣는 신문은 모두 폐간되고 정부 어용지나 다름없는 《갈색신문》만 남는다.

나는 좀 가슴이 답답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갈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책을 내는 출판사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세상에는 온통 ‘갈색’만 남는다. 갈색 커피, 갈색 사랑, 갈색 생각, 갈색 남자, 갈색 결혼, 갈색 이혼, 갈색 토마토, 갈색 배, 갈색 빨강, 갈색 까망, 갈색 하양. 모든 사람들은 이제 갈색이 아닌 것은 갖지도 쓰지도 먹지도 아마 버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갈색 개를, 갈색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도 체포되기 시작한다. 갈색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에 갈색이 아닌 것을 가졌었다는, 먹었다는, 썼다는 이유로 잡혀간다. 이 짧은 우화의 마지막은 이렇다.

“밤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리석었어요. 그들이 처음 갈색 법을 만들었을 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해요. 우리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법을 따르기만 했어요. 그때 그들에게 맞서야 했어요. 하지만 어떻게요? 모든 것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데…해야 할 일도 많고, 걱정거리도 산더미 같은데…나만 침묵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살겠다고 그저 보기만 하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아아,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굴까요? 무서워요.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세상이 온통 갈색이에요. 쾅쾅! 쾅쾅! 알았어요. 그만 두드리세요. 나가요. 나간다니까요…”(프랑크 파블로프, 《갈색 아침》)

2002년 프랑스 1차 대통령 선거 때의 일. 현직 대통령인 우파의 자크 시라크와 현직 국무총리인 좌파의 리오넬 조스팽이 2차 결선투표에 올라갈 것을 전 세계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차 투표결과는 조스팽이 탈락하고 근소한 차이로 인종차별주의자이며 파시즘 옹호자인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마린 르펜의 아버지)이 자크 시라크와 함께 결선투표에 올랐다. 일요일인 1차 투표 날 주로 조스팽의 지지자들인 젊은이들이 조스팽의 1차 투표 통과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 하나쯤 선거에 불참한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길까 하며 놀러 가버린 것이다. 결선투표에서는 좌파사회당이 우파 자크 시라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고 우파 자크 시라크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프랑크 파블로프는 《갈색 아침》의 우화내용을 풀어 떳떳하지 않은,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사소한 타협들(des petites compromissions)’이 나를, 사회를, 나라를, 세상을 치명적으로 위태롭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며, 1차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하고 놀러간 젊은이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 덕분인지 판매가 지지부진하던 이 책은 단번에 밀리언셀러가 됐다.

나는, 대학교 某기관장 시절, 정규직도 아닌 무기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기 위해 1년 11개월만에 비정규직의 사표를 우회적으로 유도한 적이 있다. 관행이라는 핑계 아래 아무런 부끄럼 없이 그 일을 저질렀는데, 실은 ‘사소한 타협들’의 하나였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실체를 알면서도 눈 감은 상당수의 사람들도 아마 별 생각 없이 ‘사소한 타협들’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내 그런 행태는, 나도 아는 어느 사람의 삶에 잊지 못할 상처를 주었고, 박근혜 게이트는 나라를 불행에 빠트렸다. ‘사소한 타협들’, 우리는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별 거 아니라며, 관행이라며, 비양심적인 야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새 정부가 시작된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숱한 타협들 중 어느 것이 우리를, 세상을 치명적 불행에 빠트릴 수 있는 ‘사소한 타협들’인지 가려내 어김없이 냅다 걷어찼으면 좋겠다. 내 판단에는, 촛불혁명은 끝났다며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 그것도 ‘사소한 타협들’의 한 징후인 듯하다.

정승옥 (강원대 불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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