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靑燕)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2005년에 개봉했으니 벌써 12년이 흘렀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조선인 최초로 민간 여류비행사가 된 박경원의 일대기를 소재로 각색한 영화다. 가난하지만 강인한 의지를 가진 식민지 출신 조선여성이 일본의 항공학교에서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과 고학의 힘든 생활을 이겨내고 결국 뜻을 이룬다는 역경 극복담.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이 뒤집어 쓴 누명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겪게 되고, 결국은 일제의 선전 비행에 내몰려 마지막 비행에서 사고로 추락사하는 비극적 종말이다. 애인, 고문, 일제에 의한 강요 등은 각색이다. 실제의 박경원은 일제를 옹호하는 친일적 행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재밌고 신선하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들이 대체로 억압과 저항, 투쟁과 헌신 등으로 일관된 단순한 주제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점을 미루어보면, 이 영화가 선택한 소재는 신선했고, 결기 있는 여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제국주의 강점기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그들의 사실적 삶이 어땠는지, 그들이 살았던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채워지고 있었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도 이 영화가 지닌 칭찬할 만한 미덕이다.

아쉬운 점은 비교적 잘 만들어진 이 영화 자체의 상업적 운명이 비극이었다는 점이다. 박경원을 일제에 저항하는 결기 있는 여성으로 묘사한 것, 즉 친일파를 미화했다는 점을 들어 세상은 이 영화에 등을 돌렸다. 각색의 과정에서 고민이 없었을 리 없지만, 사실 굳이 친일파로 알려진 사람을 애국자인 듯 과장한 점은 별로 영리한 선택은 아니었다. 차라리 친일파든 뭐든 보다 더 사실적인 접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식민지 공간이 강요하는 갈등이 개인의 열망과 좌절에 어떻게 삼투해 들어가는지 그 과정을 더욱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는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영화라는 상상을 통해 역사에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는 시도가 이렇게나 어려운 한국의 현실이다. 식민지 영화가 모조리 저항과 투쟁의 독립군 영화여야만 할 것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칫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다가 일제를 미화했다는 오명이나 누명을 쓰고 흥행에 망할 위험이 있다 보니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투자를 받기가 쉽지 않다. 소재나 주제의 선택, 이야기의 설정, 인물구성 등도 모두 살얼음판 걷듯 조심스러워지고 그러다보니 창작적 상상의 자유는 증발해 버린다.

이런 억압적 분위기의 원인은 여론재판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요즘 식으로는 ‘빠’들의 공격에 대한 공포라고나 할까? ‘노빠’, ‘문빠’ 등의 명칭으로 인터넷 상에 등장한 ‘빠’들의 적극적 활동이 극렬 팬들의 아이돌 사랑 차원을 넘어서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친위돌격대 양상을 띠는 경우도 늘고 있다. 적극적 팬덤에서 비롯된 오빠부대의 ‘빠’가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사랑하겠다는 애정표현이라는 점에서 굳이 미워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닌 반면, 정치적 이견에 대한 광신적 적대는 염려를 불러일으킨다. 관용과 상상의 공간을 말살하는 자기 검열의 억압 속에 모두를 가두게 되기 때문이다. 자살골이다.

김신동 (한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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