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도량(菩提道場) 우 빤냐 사야도(禪師)

호반순환도로를 달리다 한림성심대 앞을 지나 동면 장학리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노루목교차로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는 산길이었다. 잣나무에 에워싸인 숲길을 지나고 복숭아밭을 지나 산 중턱에 자리한 보리도량(菩提道場). 얼핏 봐선 여염집 같다. ‘테라와다승단’이란 현판이 눈에 띈다. 소승불교를 말함이다. 스님이 계신 작은 방에 들었다. 마른 몸 위에 걸친 가사와 장삼이 TV에서나 봤던 남방스님들의 것이다.
열일곱에 ‘깨달음’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는 스님. 한국불교에서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을까? 2000년 무렵 미얀마로 수행의 길을 떠나 법명도 아예 미얀마식으로 바꿨다. ‘깨달음’은 무엇이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어떠해야 할까? 우 빤냐 사야도의 가르침을 들어봤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의 삶의 행적이 궁금하게 마련이다. 다짜고짜 언제 어떻게 출가하게 됐는지를 물었다. 열일곱 살 때였다고 한다. 중국 선사(禪師)들의 이야기인 《깨달음의 길》이라는 책을 읽고 처음 마음을 품었다고 했다.


그때는 깨닫는다는 것이 이렇게 쉬운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공부하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했죠. 당시에는 ‘깨달음’을 얻는 것을 무협지에 나오는 초절정 고수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죠.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기인을 만나 무림고수가 되듯 선(禪)이라는 것, 선사라는 것이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들 같았죠.

스님은 월정사에서 계(戒)를 받았다고 한다. 구체적인 수행의 과정과 행적이 궁금했지만 스님은 선뜻 말씀을 하지 않았다. 다만 월정사를 비롯해 해인사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에 정진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작 스님이 수행에 눈을 뜬 것은 2000년도에 미얀마에 가면서부터라고 했다. 그 전에는 무림고수라는 관념의 세계에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행하면서 뭔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에는 체계가 없었습니다. 화두(話頭) 하나 던져주면 그걸 붙들고 가는데, 왜 이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나 이해가 없었죠.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수초’ 같다고나 할까. 화두를 들려면 본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조건 힘으로 몰아붙였죠. 마치 축구로 말하면 ‘뻥 축구’하는 것이죠. 당시 한국불교의 수행은 뻥 축구였습니다. 무림고수가 되기 위해 죽어라고 체력단련만 한 겁니다. 축구도 기술이 없이 강한 체력만으로는 승부를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수행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일종의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죠. 세밀함이 필요합니다. 남방불교에는 그런 세밀함이 있죠. 무조건 화두 하나 던져주고 거기에 대해 질문하면 “망상하지 마!” 당시만 해도 그랬습니다.

언젠가 해인사에서 우연히 태국 스님들을 만났다고 했다.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고 호감이 갔다. 그래서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질문은 자연스레 한국불교의 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스님은 정색을 하며 쉽게 말씀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는 안 합니다. 남의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은 그때와는 다를 겁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노력을 했으니까 어느 정도 달라졌겠죠. 아무 관심이 없어 잘 모릅니다. 그러나 뻥 축구는 면했지만 기술축구의 단계까지 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게 아니죠. ‘나’는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지만 조직이란 틀은 쉽게 변하지 않죠. 변화는 과거의 ‘나’와 과거의 조직을 부정하는 일에서 시작이 되거든요. 필연적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죠. 그래서 쉽지 않죠.

 

 

 

말씀의 뉘앙스에서 여전히 한국불교에 대한 불신을 읽을 수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일까?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한계랄까. 구조적인 문제라고 얘기하면 희망이 없죠. 흔히 시스템을 말합니다. 그러나 좋은 시스템도 좋은 사람이 있어야만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죠. 사람의 의식이 깨어있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그것을 농단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는 한 그 조직의 구조를 아무리 뜯어고쳐도 똑같죠. 결국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깨닫기 이전의 그 사람의 사유의식이죠.

물론 그렇다. 지난 정부와 현 정부를 비교해 봐도 아직은 구조나 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정부와 현 정부는 얼마나 다른가.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그 시스템의 허술함이 아닐까? 구조적으로 비리를 저지를 수 없는 사회적 시스템이라면, 잘못을 용인하고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면 누구나 더 잘못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시스템이 그 사회를 유지하는 틀인 건 맞죠. 그러나 아무리 촘촘한 그물도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을 짰다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막을 수 없죠.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과 같죠. 결국은 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사람이고, 무력화시키는 것도 사람인 것입니다. “방울을 떼어야 할 사람은 반드시 방울을 단 사람이어야 한다(解鈴還須繫鈴人)”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 목에 방울이 달려있는데, 그 방울을 뗄 수 있는 사람은 그 방울을 단 사람이라는 거죠. 왜 시스템을 말합니까?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기에 타인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도,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깨달음’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갔다. 일상을 사는 보통사람들이 모두 ‘깨달음’을 위해 출가를 할 수는 없다. 삶의 고(苦)는 대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를 끊고 살 수 없는 것이 또 현실이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고 좀 더 편안해지려면 어찌해야 할까. 우문현답(愚問賢答)인 줄 알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악을 말하는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얘기하죠. “탐진치(貪瞋痴) 3독(毒)이 늘어나면 악이고, 줄어들면 선이다.” 결국 인간이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탐진치 삼독(三毒)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편안해지려면 이 세 가지를 내려놓으면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누구나 답을 알고 있죠. 현실세계에서 편안해지는 방법은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고 그 방법만 체득하려고 합니다. 무림고수가 되려면 수많은 수련과 대결을 통해 자신의 몸에 수많은 칼자국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건 싫고 그냥 무림고수만 되고 싶죠.

※ 삼독(三毒)은 삼구(三垢), 삼화(三火), 삼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도 한다. 탐(貪)은 탐욕(貪慾)과 집착을, 진(瞋)은 진에(恚瞋) 곧 분노와 증오를, 우(愚)는 우치(愚痴) 곧 어리석음을 이른다.

결국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행동에 있다는 말씀이다. 대개 고통 없이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고 싶지만, 그런 삶을 사는 방식에 대해 훈련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에 이를 때가 됐다.

깨달음이 없는 고통의 해방은 꿈같은 얘기죠.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나를 세우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죠. 사실 쉽지 않죠. 나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나를 세우지 않는 것에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행동이 없이는 변화가 없죠. 변화가 없으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창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이제 걸음마 단계인 《춘천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야 좋을지 조언해달라는 부탁에 스님은 손사래를 친다. 그저 발걸음을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고만 말씀하신다. 방향이 잘못돼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터.

제일 어려운 게 멈추지 않는 거죠. 방향이 옳지 않다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또 다른 길로 가는 거죠. 도보순례를 할 때였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네가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고 지금 얘기하는 것은 네가 그동안 살았던 삶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해줬죠. 그랬더니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항상 무엇을 두부처럼 끊어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멈춤에서, 그 길에서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춘천사람들》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종교(宗敎)’란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현실 종교는 가르침을 잊은 지 오래다. 가르침을 빙자한 상술(商術)만이 난무한다. 권력과 물질에 환장(換腸)한 사회다.

10대 때 깨닫는 길이 공부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아서 수행의 길에 나섰다는 우 빤냐 선사(사야도). 선사는 홀로 속세와 동떨어져 자신만의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 듯했다. 법명처럼 대중과 ‘지혜(빤냐)’를 나누고 싶어 했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하늘은 여기저기 흰 빨래를 널어놓은 듯 온통 하얗다. 그 사이사이 드러난 하늘색은 일찌감치 가을을 예고한다. 한낮의 더위는 현상일 뿐 계절의 본질은 이미 가을이었던 것이다. 이미 입추(立秋)다.

 

 

 

전흥우(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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