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이었고, 그 전날 밀라다 호라코바가 교수형을 당한 때였다. 그녀는 사회당 의원이었는데, 공산주의 법정은 반국가적 행동을 했다고 그녀를 기소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폴 엘뤼아르의 친구이자 체코의 초현실주의자인 자비스 칼란드라도 그녀와 동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앙드레 브르통은 칼란드라가 인민과 인민의 희망을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그는 말도 안 되는 기소에 항의하고 오랜 친구를 구할 시도를 하기 위해 엘뤼아르에게(1950년 6월 13일자 공개편지를 통해) 호소했다. 하지만 엘뤼아르는…인민의 배신자를 옹호하기를 거부했고(1950년 6월 19일 주간지 《악시옹》을 통해) 금속성 목소리로 시를 낭독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에게 결핍되었던 힘으로/ 우리는 순순함 가득 채우리/ 이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으리〉”
-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3부 〈천사들 - 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삶은 다른 곳에》와 《웃음과 망각의 책》을 통해 스탈린을 찬양하는 폴 엘뤼아르를,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하던 시대”를 거론한다. 처형자는 스탈린이고 시인은 엘뤼아르이겠다. 친구 브르통과 결별하면서까지 스탈린을 편든 엘뤼아르의 이 정치적 여정은 쿤데라가 만들어낸 소설 속의 한 에피소드일 뿐 아니라 실제 상황이기도 하다.

엘뤼아르는 1936년 이후 정치활동 특히 공산당 활동에 열심이었으며 스탈린을 적극 지지한다. 이내 친구인 브르통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고, 1949년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맞아 훗날 잔인한 독재자로 평가받게 될, 이 괴물 지도자를 ‘사랑의 지도자(le cerveau d’amour)’로 치켜세웠다.

엘뤼아르는 1952년, 죽기 전 〈모든 것을 말하다Tout dire〉라는 시를 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를 말하는 것인데 난 표현력이 부족하고/ 시간이 모자라고 대담함이 부족하다/ 나는 꿈꾸고 내 안의 이미지들을 되는대로 지껄인다/ 나는 잘못 살았고 분명하게 말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브르통과 결별하게 되는 ‘칼란드라 사건’에 대한 회한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엘뤼아르가 스탈린의 만행에 눈 감은 것은 비난받을 일이나 프랑스문학사에서 그 점이 그의 문학을 평가할 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서정의 시대’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 쿤데라로서야 20세기 사랑의 서정시인 엘뤼아르를 어떻게 다룰까 고민했겠지만, 그를 처형자와 함께 앉아있는 시인으로 ‘처형’한 것이 소설 속에서이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 나는 흔쾌하지가 않다.

“인간의 크나큰 싸움을 선악의 다툼으로 보는 고지식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이 싸움을 비극의 조명 아래서 이해하는 것, 이것은 정신이 이룬 엄청난 성과였다.”
- 쿤데라,《커튼》〈제5부 미학과 삶〉

이 대목에 이르면, 쿤데라가 어째서 엘뤼아르의 선택을 비극의 조명 아래 따져 보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 맥락을 통해 쿤데라는 혹시나 ‘역사는 우연과 부조리, 비극적 농담들이 고리로 이어져 있는 사슬에 불과한 것 아닌가. 역사에서 자유로운 인간적 행위, 그 의미를 왜곡할 수 없고 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도 않는 행위가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친일과 독재자 찬양으로부터 끝끝내 자유롭지 못할, “흠집 많고 일그러진 진주지만, 여전히 빛나는 진주”인 미당 서정주의 스무 권짜리 전집 출간과 ‘미당문학상’ 폐지 요구 소식을 함께 들으며, 엘뤼아르를 “처형자와 함께 앉은 시인”으로 처형하는 쿤데라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옳은 일이었을까 곱씹었다. 그리고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까닭은 하늘 아래 완전무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새삼 상기한다.

정승옥 (강원대 불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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