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랫마을 윗마을 다 합치면 육십여 호가 넘는 시골에서 살았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그중 두어 집만 기와를 올린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겨울밤이면 마을 앞 들판으로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문풍지가 부르르 떨기도 했다. 밤이 깊어가고 동천의 그믐달이 기울 즈음이면 바람이 잦아들며 먼 들판에서 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지면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 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곤 했다.

내 일터가 있는 화천의 옛 지명이 고구려 때는 ‘야시매’라고 했다는데 후대에 와서는 ‘낭천(狼川)’, ‘생천(泩川)’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홍천군 화촌면의 ‘야시대’라는 지명과 함께 여우의 방언인 ‘여시(야시)’가 많이 서식하던 ‘여우골’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화천뿐 아니라 남한 땅 어디에서건 승냥이가 서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남한 땅 어디에서도 승냥이와 함께 모두 개과에 속한다는 이리와 늑대, 여우도 동물원이 아니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흔히 남자와 여자를 늑대와 여우에 비견하곤 한다. 같은 개과임에도 무리생활을 하는 늑대들과 독립생활을 한다는 여우를 빗댄 것일 게다. 늑대는 남성성, 여우는 여성성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정치·사회적 대변혁의 당대에 이러한 상징적 비유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 세계관의 혐의가 짙다. 이러한 남성중심 사고는 수컷 여우까지도 암컷으로 여기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인간을 만든다. 푸른여우·사막여우·붉은여우·구미호 등 이름만 들어도 경이롭고 존경스러운 한 존재들을 여성비하의 상징으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여성화, 여성비하의 대상이 된 것에는 고양이도 있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밑으로부터의 역사’의 지평을 열며 ‘계몽주의’ 세계관의 종말을 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우들은 인간에 의해 절멸되어 가는 운명에 처해 있다. 사육되어져 ‘여우목도리’가 되고 말기도 하지만, 여우들은 영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인들에게는 ‘여우사냥’의 놀잇감이 된다. 그 후예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가서는 들소 떼와 인디언 사냥을 했던 것이다. 아직도 유럽인들의 일부 계층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우사냥’을 한다는 이야기를 접하면 나는 ‘레드 헌팅-빨갱이 사냥’과 함께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고는 한다.

‘#MeToo’와 ‘#With You’의 열풍이 그칠 줄 모른다.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폭력적 근대를 지탱해 온 한국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한국사회 변혁의 핵심 축은 호주제 폐지, 간통죄 폐지 등을 이끌어낸 여성들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세월호 참사를 겪은 엄마들도 촛불혁명의 불씨 역할을 했다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폭력의 시대, 압축적 근대의 잔인함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며 바로 지금의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왔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춘천에서 화천으로 38선을 넘어 ‘수복지구’의 일터로 향한다.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북미정상회담까지 상상하는 꿈같은 봄날이다. 멀지 않은 날, 개마고원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이 가슴이 뛴다. 삼지연 쪽에는 분명 여우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을 듯도 하다. 그동안 부지불식간에 여성들을 여우라고 지칭했던 일이 있음을 반성하고 사과드린다. 여성은 평화다. With You.
 

김재룡 (화천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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