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를 다시 돌아본다. 아이들 셋이 각각 초등, 중등,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긴장하겠지만, 부모도 낯선 시작에 긴장하긴 매한가지였다.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지, 학교 분위기는 어떨지, 친구들은, 심지어 교장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등등 올해는 평소보다 더 많은 궁금증과 긴장이 폭발했다. 특히,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막내는 입학 전 돌봄교실을 신청했는데, 신청자가 많아 담당교사로부터 양보할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사정인즉슨 상대적으로 돌봄이 더 필요한 학생이 있는데, 양보하는 사람이 없으면 추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양보를 했고, 우리 아이는 방과후 프로그램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어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혼자 시간을 보낸다.

부모로서는 조금 더 안전하게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갈증이 있지만, 돌봄환경에 대한 학교의 상황도 그리 녹록치는 않다고 한다. 활용할 학교시설이 여의치 않거나 돌봄교사 관리를 위한 담당교사의 업무도 부담이라는 현장의 이야기가 이번 호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돌봄의 기능을 학교나 지역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정에서의 돌봄 비중이 지나치게 외부로 대체된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엔 더 어려운 상황이 된다. 돌봄교사의 자질과 근무여건, 잦은 이직 등도 아이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고려하면 단순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할 거리와 머무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의 문제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은 누가 오롯이 전담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벗어나 맞닿은 다양한 관계의 소통이 필요한 일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유연하게 가족의 돌봄이 가능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일 중심의 일상을 우리 스스로 돌아보는 것도 중요함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환경이 변하면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 예전 같지 않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학생 간의 신뢰가 교육현장의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다. 현병호 발행인의 단상인 ‘선생님은 훌륭하다(40-51쪽)’가 함께 나누는 이야기의 줄기가 되었다.

‘가르치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일까’라는 질문에 발행인은 배움의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아서 진짜 정보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고 한다. 글의 행간에 담긴 의미는 텍스트에 드러나 있지 않듯, 교사는 그 ‘행간’을 보도록 도와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표현한다.

또한, 교육과 배움은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주도학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에 있어서도 배우는 이가 정작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모르는 ‘배움의 역설’에 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여기에 훌륭한 선생의 역할이 있음을 말한다. 유능한 코치가 선수에게 어떤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는지를 꿰뚫어보고 어떤 트레이닝을 하라고 일러주는 사람인 것처럼 훌륭한 선생은 학생이 뭘 배워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할 수 있는 단순 지식이 아닌 아우름을 통한 교육이 가능해야 한다는 부분에 공감이 되었다.

‘아이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기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교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인식으로 아이들을 만나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교육’에 대한 각자의 방식과 경험이 상이한 것도 흥미로운 나눔이었지만, 현병오 발행인의 표현이 참 와 닿았다. “민주적인 교사는 아이들을 타자화하지 않으면서 아이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완벽한 교사를 바라기보다는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학교’이길 바란다. 나 또한 그 마음으로 선생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계실 ‘훌륭한 선생님’들을 응원하는 학부모가 되어야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윤정(공유가치창출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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