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질긴 삶을 살았다. 누군가는 그를 풍운아라고 불렀다. 하긴 35세에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권력의 실세가 되었고, 45세에 최초로 국무총리가 된 후 국무총리 2번과 국회의원 9선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며 92년을 장수했으니 그의 인생이 성공한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게다.

영욕의 세월이었다. 김종필은 해방 후 군에 들어가 박정희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니 그의 미래는 이미 그때 결정이 났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 처삼촌과 조카사위는 혁명동지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에 특사로 파견되어 당시 일본 외상인 오히라(大平)와 회담해 굴욕적인 한일관계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그것이다. 그 3년 뒤에는 당시 한일은행 전무였던 그의 친형 김종락이 ‘독도밀약’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독도 영유권 분쟁의 불씨를 키웠다.

서슬 퍼런 박정희 군부독재는 박정희의 심복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무너졌다. 유신체제가 몰락하면서 그는 오랜 시간 야인생활을 했다. 그가 정치무대에 복귀한 것은 1987년이었다. 6월항쟁의 전리품이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그의 정치적 복권이 실현됐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후 그는 현란한 정치행보를 이어간다. 결코 1인자가 될 수 없었던 그다. 그래서 1990년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민정당과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야합해 민자당을 창당했고, 그 7년 뒤에는 자신이 고립시켰던 바로 그 김대중과 이른바 ‘DJP연합’을 통해 다시 국무총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변신은 늘 용두사미로 끝났다.

그의 화려한 정치역정은 2004년에 종말을 고한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으로서 헌정 사상 초유의 10선 고지를 노렸으나, 정당득표율은 고작 2.8%에 그쳤다. 그의 마지막 꿈은 좌절됐고, 결국 그해 4월 19일 자민련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의 정계은퇴가 그가 쿠데타로 무너뜨린 장면 정권의 배경이었던 4·19혁명 기념일이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에 반대하는 국민청원이 3일 만에 1만명에 육박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한국 현대사에서 영욕을 겪으면서도 당신이 해야 될 몫을 당당히 해주신 데 늘 감사드리고 있다”고 했고, 이낙연 국무총리도 “전임 총리이기 때문에 공적을 기려 정부에서 소홀함이 없게 할 것”이라며 훈장추서를 당연하다는 듯이 밝혔다.

그가 한 당당한 “몫”은 무엇이고, “공적”은 또 무엇일까? 쿠데타를 일으키고,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한일관계를 왜곡시키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할 수 있었던 정치력일까? 두 번의 국무총리, 김영삼과 박준규와 더불어 단 세 명뿐인 9선의 국회의원이라는 화려한 정치경력일까?

아무튼 그는 마침내 갔다. 강고했던 분단의 사슬이 끊어지려고 하는 이때, 보수정당의 궤멸이라는 유례없는 정치사적 대사건으로 기록될 이번 지방선거가 끝난 바로 이때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듯 떠났다. 그의 이름대로 그의 죽음은 지난 시대의 종필(終畢)이다.
 

전흥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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