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리는 2007년 ‘통곡(通谷: 한 줄기로 이어가는 골짜기)’이라는 마을 이름이 소리를 높여 슬피 운다는 ‘통곡(痛哭)’으로 오인돼 좋지 않다는 주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산수리(山水里)로 개명됐다. 산수리는 남으로는 홍천강을 사이에 두고 어유포리, 반곡리, 개야리와 경계에 있고, 서쪽으로는 광판리, 북쪽은 행촌리와 추곡리, 동으로는 한덕리와 통한다.

춘천시내에서 팔봉산 방향으로 홍천강변을 끼고 달리다 반곡교 앞에서 우회전을 해도 되지만 어유포리 삼거리에서 산수1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이 길은 일본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코모리 마을 숲길 같았다. 높지 않은 내리막을 내려오면 삼거리에 산수마을을 알리는 둥근 구조물이 있고, 흔하지 않은 마가목 가로수 풍경을 만나게 된다.

왼쪽 길은 산수1리, 오른쪽 길은 홍천강변의 산수2리다. 마을 중간쯤 되는 이 삼거리 근처에 폐교된 통곡분교가 있다. 1937년 개교한 통곡분교는 2009년 3월 1일 폐교됐다. 이날 통곡분교에 동창모임이 있어 34회 졸업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실이 세 개 있었는데, 두 학년이 합반해서 공부를 했어요. 선생님도 세 분이셨죠.”

통곡분교는 폐교 후 한림대학교에서 수련원으로 이용하다가 도자기를 전공했다는 어느 예술가가 ‘초록바람’이라는 문화공간을 만들어 전시도 하고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렇게 입주자가 바뀌면서 학교는 방치되고 있었고 교육청에서도 오랫동안 임차인이 없어 관리가 안 되어 고민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산수리 향우회에서 2016년에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서 임차를 했어요.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라 모교를 우리 손으로 꾸미고 지키자는 마음에 다들 동의했지요.”

학교 앞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운동장 옆 텃밭은 주말농장으로 분양을 했다. 총무를 맡고 있는 신성식(50) 씨는 학교 운동장 잔디를 깎고 있었다. 시설물 관리는 대부분 신씨가 맡고 있었는데, 아직 시작단계라 체계가 잡힌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문화적으로 소외 받는 시골주민을 위해 거창하지는 않지만,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숨은 산수리의 비경을 트레킹 코스로 활용하는 등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조용하고 겸손한 신씨를 대신해 옆 마을에 사는 이연희(여·55) 목사가 산수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5월 어버이날이 끼어 있는 주말에는 마을 경로잔치를 해요. 시골 마을들이 많이들 하고 있지만 이 마을은 특별해요. 이 학교 출신들로 구성된 향우회를 중심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그 자손들이 모두 참여하는 마을은 드물 거예요. 누구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모두의 부모님인 거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단합도 잘 되어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옆에서 봐도 흐뭇해요. 이런 전통을 널리 알리고 잘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신 총무가 소개하는 폭포로 향했다. 마을회관 앞에서 왼쪽 마을을 큰골이라 불렀다.

“폭포 이름은 따로 없어요. 어릴 때는 작은 폭포, 큰 폭포라 불렀고 지금은 산수리의 옛 이름을 따서 통골폭포라 부르거나 산수리폭포라고 불러요.”

임도는 차가 진입할 수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림청에서도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데 차가 다닐 정도의 길을 내자니 계곡이 협소해 풍경을 해칠 것 같아 생태환경을 고려해 포기했다고 한다. 큰골 골짜기는 계곡을 끼고 넓은 바위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다 떨어지는 작은 폭포들이 이어졌고, 한 시간 정도 걸어서 고개를 넘으면 발산리·한덕리 임도와 연결되는 셉일고개와 만난다. 한덕리 임도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어디쯤인지 궁금했다. 머릿속이 바빠졌다. ‘산수1리 마을회관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큰골 골짜기를 넘고, 셉일고개에서 발산리 버스 타는 곳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는 생각과 가을산행을 계획하며 내려오는 산길에는 쪽동백 열매가 쪼르르 달리고 산다래도 제법 실하다. 그땐 다래가 제법 맛이 들겠지? 가래나무 아래 노루오줌꽃이 뒤늦게 배시시 웃는다.

산수1리 마을회관 오른쪽 길은 통골의 가장 안쪽마을이자 광판리 임도의 들머리다. 광판리 임도는 산수리 통골과 광판 구은동1길과 통하고, 고개 하나를 더 넘으면 추곡리와 행촌리까지 연결된다. 이곳에는 귀촌한 13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귀촌마을 첫 집이 산수1리 이장 이장식(55) 씨 집이다. 전원주택 단지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한 집 두 집 모여들어 살다보니 13가구가 되었다.

“이웃이라 말하면 너무 먼 사이고요. 형제같이 지내요. 서울에서 주말에만 다녀가는 가족들은 못 오는 날도 있으니 두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하고요. 주말만 되면 이 동네가 시끌벅적해요. 이집 저집 돌아가며 모여서 밥 먹고, 못 내려오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번개로도 만나요. 이제는 가족내력도 다 알고, 밤이면 주거니 받거니 술이 새요. 내일은 어르신들 삼계탕 대접할거고요. 다음 주에는 마을 전체모임이 있어요.”

가장 먼저 들어왔다는 이의 집에는 이장을 비롯해 몇 가구가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닭, 오리, 낙지, 전복을 넣고 푹 삶아 녹두를 넣어 죽을 끓였다. 나그네에게도 녹두죽 한 그릇이 돌아왔다. 이장은 산수리에서 태어나 통곡분교를 다녔다. 이장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으며 마을회관으로 내려왔다

“할머니 아버지 따라 소 팔러 춘천 나가는 날은 집에서 먹을 걸 싸들고, 덕만이고개를 넘어서 지금 홈플러스 옆 우시장까지 하루 종일 걸어갔지요. 생필품은 광판리 오일장에서 샀는데 장이 엄청 컸어요. 가설극장도 있어서 그때 영화를 처음 봤어요.”

군인 장교로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퇴역 후 홍천강변에서 펜션을 했다. 시장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아 아내가 과로로 쓰러져 3년 만에 사업을 접고 산수리 부모님 집 곁에 집을 짓고 마을 일을 보고 있다. 마을회관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들일도 품앗이로 하는데 새벽에 만나 누구네 들깨를 심고는 점심 먹으러 회관에 모였다. 주인장은 식사와 참만 준비하면 된다.

 

회관 앞의 들에는 도라지꽃이 눈부시고 접시꽃이 여름햇살만큼이나 강렬했다.

“저기 멀리 보이는 산 중간 능선에 ‘창바위’라는 멋진 암벽이 있어요. 능선 위 소나무 늘어선 곳 커다란 암벽에 창문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창바위’라고 불러요. 어렸을 때 거기 많이 갔었죠. 그 너머가 홍천강가 마을이에요. 지금도 등산로가 있어요.”

마을에 있는 작은 등산로는 두어 시간이면 족한 코스들이 많고, 올라갔다 다른 길로 내려와도 산수리 마을이라서 여행객에게 부담 없는 코스라고 했다.

회관 앞은 버스종점이다. 여기 들어오는 시내버스는 후평동에서 출발하는 1·2·3번으로 1번 노선이 가장 빠르다.

회관에서 통곡분교를 지나 산수2리 강변마을로 갔다. 홍천강 길은 겨우 차가 교차하는 좁은 길로 벚나무, 자작나무, 단풍나무, 꼬리진달래 등 수종이 다양하고 울창해서 갈 때마다 감동이다. 강변에는 펜션, 음식점, 캠핑장 등이 즐비하고 래프팅을 즐길 수도 있다. 섭씨 35도를 웃도는 폭염에 많은 사람들이 강변으로 피서를 나왔다. 텐트를 치고 다슬기를 잡는가 하면 낚시를 하고 보트를 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한여름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산수2리 가장 남쪽 U자로 강이 돌아나가는 곳에 ‘논골’이 있다. 길이 없어 배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던 시절, 1990년부터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와 홍천강변 오지 논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밤이면 학문연구에 몰두했던 학자가 있었다. 역사지리학자인 최영준 씨가 2010년에 출간한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이란 책은 그의 일기를 추린 기록이다. 시골살이를 하며 농업인이 되어가는 기쁨과 사소한 탐욕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분노,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그의 철학이 녹아있다.

오지였던 논골은 이제 86번 국도 바로 아래 있고, 2번과 53번 버스 정류장도 논골 입구에 있다. 도로에서 400m면 홍천강변이다. 강촌 IC에서 10분 거리에 있고, 남춘천 IC에서 오는 길도 공사 중이다.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물 좋고 산 좋고 사람 좋은 마을에 찾아드는 이가 많다니 반가운 일이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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