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리에 터 잡은 정춘일·김은숙 부부

 

산골에서 만나는 로봇과 미용실, 조각가와 미용사 부부. 이들을 알기 전까지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어찌 보면 자연과는 조화롭지 못할 것 같은 메탈의 로봇작품과 도시에서만 보던 미용실을 산골에 열었다니 부부의 삶이 더욱 궁금했다.

북한강을 따라 용산리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작고 노란 ‘풍경이 있는 산마루 미용실’이란 간판이 있다. 삿갓봉 자락이 갈라져 마을을 감싸니 자궁 속처럼 포근한 용산리 가장 안쪽에 정춘일·김은숙 가족의 보금자리가 숨겨져 있었다.

잔디가 파랗게 깔려 있는 마당에는 정춘일(48) 씨의 손에서 거듭난 로봇 작품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아내 김은숙(42) 씨가 운영하는 미용실을 알리는 작은 로봇은 상모를 쓰고 징을 치는 사당패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정겹기 그지없다. 마당 가장자리에 흐르는 개울 위의 정자도 정 작가의 손길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구석진 곳 비닐하우스에는 온갖 잡동사니 고물들이 쌓여 있고 정 작가는 작업 중인 로봇에 생명을 불어 넣는 중이었다.

1993년 단국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가난한 청년 작가는 화폭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던 중, 잘 나가는 압구정동 미용실에서 근무하던 앳된 스물한 살의 김씨를 만났다.

“나쁜 남자 포스였어요. 말수도 적고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좀 불만일 때도 있었는데, 어느 날 제 말을 다 듣고 있었고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럴 때 감동인 거죠. 멋있는 남자였어요.”

가진 것 없지만 멋진 남자를 알아보는 눈 높은 착한 여자는 스물넷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야말로 숟가락 둘, 젓가락 둘로 시작한 살림이었다.

“인사동 부근에 살 때는 남편의 선후배들이 전시를 할 때마다 우리 집에서 묵고 가는 일이 허다했어요. 오는 사람 마다하지 않아 좁은 집은 손님들로 늘 북적였는데, 그때 선후배들이 최고라고 칭찬하는 말을 통해 남편의 가치를 알게 되었죠.”

생활이 녹록치 않았지만 대학원을 가고 싶다는 남편을 적극 지지하고 뒷받침을 했다. 학교를 갈 때도 둘은 함께 했고, 교수님도 김씨의 입실을 허락했다. 덕분에 미술품을 감상하는 김씨의 안목도 높아졌다. 남편 정씨는 대학원을 다니며 평면에서 입체작업으로 전환했다. 지인들의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며 작업도 병행했다. 열심히 일하며 행복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고난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렵게 가능했던 첫 임신은 유산으로 이어졌고, 김씨는 2년 이상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한 달에도 서너 번씩 하는 질 초음파 치료에 수치심도 들고 호르몬 과다 부작용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했다. 치료를 포기한 얼마 뒤 기적같이 임신을 했고 첫째 아이를 출산했다. 두 번이나 계속된 유산은 충격이었지만, 재차 호르몬 치료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둘째를 보았다. 뒤이어 셋째까지 그토록 원하던 보배로운 아이들을 얻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정씨는 다니던 인테리어 회사가 어려워지자 독립해 벽화사업에 진출했지만 사업은 실패로 이어졌다.

다시 인테리어 일로 전국을 돌던 정씨는 시골살이를 꿈꾸게 되었지만 아내의 마음은 여전히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남편의 귀가만을 기다리는 삶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고 아이들 교육이 더 큰 불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제가 논문처럼 장문의 편지를 써서 설득하고 협박도 하며 4년을 꼬드겼어요. 그러다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어느 암자 일을 맡게 되었는데, 집사람과 아이들을 지리산으로 불러 일하는 내내 오롯이 자연 속에서 가족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이전에도 고흥, 강진 등 지방 일을 하며 가족들이 함께 한 일은 많았지만 그때는 여행의 개념이었다.

“그때 남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졌어요. 산골에서 캠핑생활처럼 지낸 긴 시간 동안 남편의 다른 모습을 보았고 면역력이 약해 늘 건강이 걱정이었던 아이들이 흙을 밟고 숲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탈이 나지 않았어요.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2011년 결심하자마자 당장 집을 정리하고 춘천으로 내려왔다. 전 재산을 털어 용산리의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서류상 아무 문제가 없던 곳이었지만 부지를 구입하고 난 후 앞집과 1년 동안이나 분쟁이 이어졌다. 그 땅을 주차장으로 써 오던 앞집에서 그들 부부의 땅을 침범한 것이었다. 문제를 제기하자 차로 길목을 막고, 동네사람들의 말씨와 눈빛도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오랫동안 상처가 되었다. 그녀는 울컥 눈물을 흘렸다.

“우리 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미용실 허가문제며 집 짓는 문제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꼬박 1년이나 전쟁을 치렀어요. 일도 못하고 집도 못 짓고 1년을 허비하며 맘고생을 했어요. 이젠 괜찮아요. 지금 이 모습을 갖추기까지 고생도 많았지만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 밥상을 마주하던 시간도 이젠 재미있는 추억이에요.”

돌을 나르고 마당을 고르고 텃밭을 일구고 집을 고치고 이 모든 일은 가족이 함께 했다. 솜씨 좋은 남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텃밭의 유기농 농사 외에 지난해부터는 양봉을 시작했다.

미용실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단순히 머리를 손질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인의 얼굴이 돋보이도록 디자인을 하고 때론 업무와 어울리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모님들과 연예인 사업가들의 이미지를 책임졌던 그녀다. 지금도 서울에서 예약을 하고 오는 손님이 있다.

남편의 서류작업도 돕는 그녀는 집안일 하랴 풀 뽑으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바쁘다.

남편은 지난해 고향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CITY & JUNGLE + ROBOT’이란 주제로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관을 가득 채운 ‘정크아트전’은 춘천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제 작업에만 몰두한다.

“쾰른 아트페어와 바젤 아트페어는 국제적인 큰 미술시장입니다. 거기에서 연락이 왔는데 돈이 없어 못 갔어요. 작품 운송비만 1천만원이 들어가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한국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 늘어서 뿌듯하고, 여러 아트페어에서 불러주어 작업이 많아졌어요.”

요즘은 국내 아트페어용 작품을 준비하면서 스테인리스로 조명작업을 하고 있다. 점점 ‘오브제(objet :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품 따위를 그대로 독립된 작품으로 제시해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의 소재인 고물을 뒤지는 일도 쉽지는 않다고 했다. 남편의 작품에는 부부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치열한 삶을 살아오면서도 부부는 조급하지 않았고 부족한 현실에 만족할 줄 알았다. 쓰레기 더미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찾아낸 것들을 잇고 붙이는 그의 땀방울이 작품에서 고스란히 숨쉬고, 자연 속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그녀의 손에 아이들이 꿈을 키워내고 있다. 부부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로를 보며 눈빛을 교환하고 웃음을 나누는 모습은 험난한 소용돌이를 이겨내고 잔잔한 호수에 이르러 순풍에 살랑거리는 나룻배 같았다. 그들의 자존심은 든든한 돛대요, 아이들은 길을 안내하는 등대다.

“우리는 부모잖아요.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 것인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간명하게 보여줄 뿐이지요.”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부의 얼굴엔 아름다운 주름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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