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가 새로운 시정방향의 틀을 잡기 위해 출범시킨 ‘행복한 시민정부 준비위원회’의 하부 위원회 가운데 하나인 직접민주주의위원회를 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공직사회 일각에서는 직접민주주의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같이 규모가 작은 국가에서 권한을 가진 몇몇 사람들로 참여가 제한된 정치체제에서나 가능할 것이라며 회의론을 수군거리기도 한다. 익명성이 팽배한 현대 대중사회에서는 참여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직접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되묻는다.

대한민국은 국토면적으로 보면 미국과 같은 나라의 한 주보다 작은 데 비해 정보통신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르니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에 직면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생각해낼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사람이 모여서 얼굴을 맞대봐야 거기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현 불가능할지도 모를 직접민주주의를 지방자치, 분권시대를 새롭게 열기 위한 주요한 장치로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새로운 시대, 변화한 춘천을 만들고자 하더라도 이런 목표는 몽상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지금 인류가 가치 있는 일로 여기고 사회운영의 주요 원리로 여기고 있는 이상이 모두 실현가능한 목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 가령 일상 속에서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민주주의란 이상을 보자. 국민이, 시민이 나라와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개념인데 논의와 결정에 참여하는 권리가 똑같이 개인에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세상을 움직이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국가경영에 직접 참여할 수 없고 그런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기회가 똑같이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이며 그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사회라는 말이지 민주주의가 완성된 상태에 도달한 사회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행복한 시민정부 준비위원회’의 직접민주주의위원회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중앙정부가 지난해 좌절된 헌법개정안에 담았고 올 하반기 이후 다시 상정될 헌법개정안에도 담을 것으로 예상하는 지방자치와 분권 강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민이 자신의 삶에 관련된 모든 일의 계획과 실행에 한 부분으로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일을 주도해나가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한국사회가 제대로 자치와 분권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는 내용이라 봐야 한다.

실제로 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해가려면 사회 구성원인 시민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춘천시정에서 직접민주주의라는 지향성을 드러낸 일은 적절했다. 이때 춘천시민이 해야 할 일은 그 가능성을 두고 소모적 논쟁을 할 일이 아니라 당장 주인의 자세로 행동에 나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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