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연과 수련이 피어있는 최관용 씨의 연못.
어리연과 수련이 피어있는 최관용 씨의 연못.

북산면은 소양댐 건설로 가장 불편하고 아픔이 많은 곳이다. 비옥했던 넓은 들은 사라지고 주민들은 산골짜기로 이주하거나 살던 고향을 버리고 타지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평리는 북산면사무소와 북산지서 등 중요시설이 있어 소양댐 건설 전에는 3천80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큰 마을이었기에 그 아픔이 더했을 것이다.

양구 가는 46번 국도를 따라 배후령터널과 추곡터널을 지나면 북산으로 들어가는 추곡삼거리가 나온다. 왼편 초입의 추곡초등학교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현재 북산면사무소가 있는 오항리다. 오항리 뱃터 방향으로 가다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내평리 이정표가 있고 수청교를 건너 수청골 두어 가구를 지나면 고갯마루가 높다. 수청골에서 뱃터까지는 약 3km로 길따라 작은 계곡이 흐르고 주변에 드문드문 몇 가구만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마을길은 큰길 하나뿐이고 상주하는 가구는 5가구 정도이니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내평리 선착장.
내평리 선착장.

여름장마가 잠시 소강상태로 보이자 구름이 걷히고 샛별이 희미하게 보였다. 초저녁 내평리로 향했다. 뱃터 주변 길가에는 낚시꾼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몰고 온 서너 대의 차량이 있었지만 인적은 없었다. 별은 점차 밝아지고 소양호에 달빛이 하얗게 내려왔다.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로 은하수가 뿌옇게 흐르고 북두칠성이 산에 걸터앉았다. 수변은 금새 싸늘해졌다. 내평리의 새벽을 기다리며 차에서 잠시 졸았는데 주변에서 동물이 서성이는 소리가 났다. 차 문 앞에 백구 한 마리가 앉아서 떠나지를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공포감에 어찌 할 바를 몰랐는데, 과자를 몇 개 주니 받아먹고 갔다가는 다시 와서 문 앞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동네 백구와 별보고 놀다가 아침을 맞았다. 호수의 물안개는 옅은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뱃터 앞에 사는 내평농군이라는 네이버 닉네임을 가진 털보아저씨를 만났다. 도시에서 IT회사에서 20년 근속하고 퇴직 후 10년 전에 내평리에 진돗개 진솔이와 함께 정착했다. 그의 주 수입원은 산양삼이다. 백구는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걷는 폼이 제법 격이 있어 보였다.

“라이카라는 사냥개 종류예요. 백구는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온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낯선 손님들과도 금새 친해져서 낚시꾼들이 오면 같이 놀고, 얼마 전에는 삼밭에 멧돼지가 얼씬거리는 걸 진솔이와 진구가 합세해서 잡았어요.”

산양삼을 재배하는 내평 농군 털보아저씨.
산양삼을 재배하는 내평 농군 털보아저씨.

털보 최관용(56) 씨는 산 2만평을 혼자 가꾸고 있었다. 과실수를 심고 집 뒤뜰에는 잔디를 심고, 계곡 아래에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다. 집 주변에 둘레 길을 만드는 중이다. 지인들이 놀러오면 캠핑자리도 내어주고 텃밭의 채소와 매실도 따가게 한다.

“제가 눈이 작기도 하고 도시생활 했을 때는 좀 날카로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표정이 달라졌어요. 이렇게 베풀고 사는 게 좋아요. 방문객은 고맙다며 삼을 팔아주고 저는 외롭지 않아서 좋고요.”

음악을 좋아하는 최씨는 기타, 색소폰, 드럼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지인들이 방문해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고 했다. 최씨가 물놀이 명당이라고 안내하는 집 앞 계곡에는 작은 폭포가 나무에 가려져 있었다. 흔쾌히 놀러오라는 말에 냉큼 대답했다.

내평리(內坪里)는 본래 춘천군 북산외면의 지역으로, 소양강(昭陽江) 안쪽 들이어서 내평(內坪)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북두루, 고일, 구석리, 당골, 삼밭골, 뱅(백)민터, 배소구미, 우버덩, 버들골, 한터를 병합하여 내평리라 하였다.

오항리에서 노랑저고리 분홍치마를 입고 가마도 없어 걸어서 내평리로 시집왔다는 할머니를 만났다.

최현숙씨가 차려준 시골 밥상.
최현숙씨가 차려준 시골 밥상.

“시집오기 전 몇 년을 난리 때 여기저기 피란 다니다 돌아오니 마을이 아주 쑥대밭이 되었어. 집은 다 불타고 오항리 사람들도 많이 죽었지. 전쟁이 끝나고 이 마을로 시집와 농사를 짓고 살았어. 8남매를 낳았는데 입덧이 심해서 개복숭아 말고는 못 먹었어요. 열매가 해를 걸러 열리곤 했는데 마침 내가 그때마다 임신을 했어. 한광주리 주워 머리에 이어가다가 길가에 내려놓고는 실컷 먹었지. 새콤한 게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가끔 보따리 장사가 들어오면 생선도 사먹고 그랬지. 막 시집와서는 길쌈하는 걸 배우고 삼도 삼았어. 베를 짜서 여름 옷 해 입고, 겨울엔 목화솜으로 누벼서 옷 해 입고 이불 만들고 그랬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곁에 있던 최현숙(58) 씨가 순식간에 점심상을 차려주었다. 검정 차양막을 친 하우스 안 평상에 두부찌개와 정갈한 밑반찬이 놓여졌다. 말 그대로 인정이 수북하게 담긴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현숙씨는 할머니의 셋째 딸이다. 어머니가 암수술을 받고 형제들은 고향집 터에 어머니를 모셨다. 둘째언니가 엄마와 함께 살고 있고 현숙씨 부부는 주말이면 이곳으로 들어온다. 울타리처럼 해바라기가 갓길에 피었고 그 아래 부추꽃이 소박하게 한들거렸다. 마당에는 채소밭과 여름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저는 물속에 잠긴 내평국민학교를 다녔어요. 소양댐을 짓는다고 지금 폐교가 된 학교를 공사할 때 저희는 면사무소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는 아이들이 칠팔백 명쯤 되었을 거예요. 우리 집이 여기 산골이라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이 집 앞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 감고 놀았어요. 여기가 우리 동네 아이들 아지트였죠. 그런데 어느 날 지금 이 땅을 판다는 소문이 났어요. 내가 늘 놀던 곳인데 자꾸 눈에 밟혀서 안되겠더라구요. 4년 전에 이 땅을 사고 이렇게 다니고 있어요. 남편은 개인택시를 40년하고, 나는 제조회사에 16년째 다니며 아이들 다 가르치고 이제 살 만해요."

벌초를 갔던 현숙씨 남편이 동생과 조카들과 함께 들어왔다. 화천 운수골에서 이곳에 시집온 동서 김종금(47) 씨는 현숙씨와 손발이 착착 맞았다. 가마솥을 이용해 음식을 마련하고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흐뭇했다.

가마솥에서 요리를 하는 동서지간 최현숙 씨와 김종금 씨.
가마솥에서 요리를 하는 동서지간 최현숙 씨와 김종금 씨.

현숙씨의 남동생 최영용(55) 씨도 어머니 집과 누이의 집 가운데 땅을 마련했다. 영용씨네 마당으로 개울이 흘렀고 거기 서 있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영용씨는 시흥에 있는 기아자동차에 30년째 다니고 있다. 산을 좋아해서 산악회장을 맡아 한 달에 한 번은 산행을 하고 나머지 주말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특히 버섯과 약초에 관심이 많다.

개울 건너 큰길에서 백구와 눈이 마주쳤다. 백구가 달려와 겅중겅중 뛰며 아는 체를 하니 친구를 만난 듯 기쁘다.

“얘는 이 동네 파수꾼이에요. 온 동네 다 돌아다니며 꼬리 흔들고 다리를 쓱 비비고 애정표시를 하며 이쁜 짓은 다 해요.”

크고 단단한 버섯을 작두로 썰던 최씨는 방태산에서 어제 채취한 표교버섯을 맛보여주었다. 향이 진하고 쌉쌀했다. 잔나비걸상이란 버섯은 처음 봤는데 원숭이가 걸터앉아 있을 만큼 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최씨는 물속에 있던 본교는 다니지 못했다. 면사무소에서 임시 학교를 2년 다니고 영용씨네 건너에 있는 분교를 2년 다녔다. 그리고 지내리로 이사 나와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고향 내평리에 4년 전에 터를 마련했고 은퇴 후엔 이곳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이다. 언제든지 놀러오라며 최씨가 건넨 향긋한 더덕꽃을 씹으며 폐교로 향했다.

더덕꽃을 따주는 최영용 씨와 동네 파수꾼 백구.
더덕꽃을 따주는 최영용 씨와 동네 파수꾼 백구.

폐교 입구에는 하얀 자작나무가 시원스럽고 운동장에서 건물로 오르는 돌계단이 운치 있었다. 유리창을 한참 두드리니 주인장이 나왔다. 문 사이로 보이는 내부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곳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원로부부 화가가 살고 있다. 미국에서 전람회가 있어 짐을 싸고 있던 부부는 그림을 보고 싶다는 요청에 작업실 내부를 보여주었다. 오일 파스텔로 칠판에 그린 아이들 그림이 필름을 인화한 오래된 사진 같았다. 완전히 다른 느낌의 에칭작업을 한 자갈밭 그림은 둥글고 뽀얀 빛이 돌멩이 안으로 흡수되어 은은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원로 부부화가가 거주하는 폐교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정겹게 느껴진다.
원로 부부화가가 거주하는 폐교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정겹게 느껴진다.

“내가 공부하고, 화가의 길로 이곳으로 오던 과정이 그랬고 타협을 하지 말고 내 길을 닦아야 해요. 내일이 있는 게 아니에요. 오늘만이 여기 있음이 고마운 것입니다.”

이곳에 오게 된 계기와 그간의 삶을 간단히 소개하며 자신들의 삶을 그린 책을 한 권 주었다. 노부부는 자신들을 드러내길 꺼려했다.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부탁에 작가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김예진 시민기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