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아 (시인)
금시아 (시인)

창을 흔드는 명제 하나, 오늘을 깨운다. 찬 가을비가 물든 것들을 털어내고 있는 아침. 엊그제 그리고 오늘, 벌써 두 번째다. 비바람은 한바탕 가지를 흔들어대고 바람은 젖은 것들을 말려 또 한바탕 휩쓸고 간다. 아등바등, 한 해가 수습되고 있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삶은 살아지는 것일까? 살아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은 북적거리고 삶은 소란스러운데 매 순간 휩쓸리면서도 결국 나는 혼자다. 자신을 꼭꼭 닫아걸거나 활짝 열어젖히거나 삶의 중력은 공평해서 혼자 살아지는 것이고 혼자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개똥벌레처럼 나를 궁굴리면서 어떤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사는 것일까? 많은 삶의 공식을 암기하고 터득하면서도 나는 단풍잎처럼 굴러 떨어지는 어떤 일상에 당황한다.

《내가 살았던 집》은 은희경의 원작 소설이자 이윤기가 연출한 TV문학관 단편 드라마다. 작품은 커리우먼이자 미혼모인 한 여자의 사랑과 삶을 그리고 있다. 서로 닿아 있는 부분부터 썩기 시작하는 사과를 보면서 사람도 가까울수록 서로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임을 알아가는 《내가 살았던 집》. 소설과 드라마는 애인이 사고로 죽은 ‘교통사고 사망지역’이라는 위험표시 팻말에 기대어 흘리는 그녀의 눈물을 클로즈업하며 끝맺는다. 그의 교통사고 현장이 그와 꿈속에서나 살아보았던 커다란 문패가 있는 다정한 집이라니. 삶에 아이러니가 없다면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생 학파에 든 적이 없고 당대의 유행 사조를 경멸했다는 비트겐슈타인. 그의 ‘그림 이론’에 《내가 살았던 집》을 대입해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이론’에서 “명제들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이며 사고는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하나의 명제다. 명제는 숨을 조여 오는 삶 앞에 닫힌 책처럼 침묵으로 대응한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그것은 자신의 논리적 사실을 표현한 그림일 수밖에 없다. 은희경 작가는 누구에게나 휘몰아칠 수 있는 짙푸른 삶의 소용돌이를 시종일관 투명하게 색칠하고 있다. 거기에다 드라마는 자신의 캐릭터가 뚜렷한 배종옥의 연기를 투입해 높이를 잴 수 없는 파고의 삶을 그저 담담하게 채색한다. 명제의 이미지화다. 이미지화는 드라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드라마는 단편의 명성이 전혀 누락되지 않을 만큼 몰두하게 했다. 묵직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는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시청자의 몫이 되었다. 어떤 삶이건 그 어떤 정석으로도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정된 이별이건 느닷없는 이별이건 이별은 서로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빗방울과 낙엽 같다. 아픔과 슬픔, 행복과 불행, 그리고 상실, 외로움 등등. 기억들은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풀처럼 일상을 비집고 파고든다. 이별을 또 다른 그림 그리기의 시작이라고 하자. 그녀는 무거운 돌처럼 자처하던 침묵을 말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씻어낸다. 이미 또 다른 그림 그리기의 시작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한 비트겐슈타인. 그 침묵에 대한 나의 상상은 절망이라기보다 희망적이다.

비가 그쳤는데도 바람은 창밖 나무 끝에 매달려 있다. 저 나무와 나뭇잎이 이별하는 동안 경비아저씨와 바람의 애꿎은 실랑이는 계속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집보다 지금 내가 색칠하고 있는 이 순간의 그림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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