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 신대수 씨의 도전과 꿈

강원대학교 교정에서 신대수(65) 씨를 만났다. 굽이쳐 흘러 온 자리를 탓하지 않고, 갈 길에 조급함이 없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같은 사람이었다. 이순(耳順)을 넘긴 2016년 8월, 강원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 <신숭겸의 출신·성장과 선양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박사과정에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갤러리나 공연장에서 이따금씩 마주쳤던 그가 한국사회에서는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열 시간 이상을 책상에 앉아 학구열을 태우게 된 연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대수 씨
신대수 씨

“사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에요. 저는 서면이 고향이에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를 춘천시내 학교로 배정 받으려고 유학을 나왔는데 그때는 철이 없어 공부에 몰두하지 못했어요. 한 번도 춘천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고향의 역사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터라 자연스레 관심이 많았어요. 2011년 만들어진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 2013년부터 참여하며 춘천의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2015년 ‘충장공 한백록 기념사업회’에도 관여하며 좀 더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졌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농협에 입사해서 수매관련 일을 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다. 농협의 정책도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았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던 30대에는 사업에 대한 포부도 있어 젊은 혈기로 덤볐던 사무기기와 의료기 사업은 연이어 실패를 거듭했다. IMF금융위기가 오자 건설업의 침체와 연쇄부도로 재기를 위해 시작했던 창호제조공장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막막했다. 

“인생이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게 별로 없잖아요. 제게도 크고 작은 험난한 길들이 있었는데 사업의 실패는 있었어도 좌절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받아야 할 돈도 많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집착할수록 더 힘들어지기에 어느 날 장부를 다 불태워버렸죠. 그리고는 잊어버렸어요.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도 시간만 나면 책을 손에 들었고 공연장과 전시장을 다녔어요. 늘 아내와 함께였어요. 왜 상처가 없었겠어요. 화가 날 때도 있었고 낭패감에 착잡했던 날들도, 아내에게 미안한 날도 많았죠. 그런 날일수록 그림을 감상하고 공연을 보며 달래고 책을 읽으며 제 자신을 돌아보았죠. 특히 인생의 성공을 이루었다는 위인들의 삶에서 저의 부족함을 묻고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업에 실패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죠.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시간들이었어요. 그렇게 우리 둘은 힘든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죠. 이런 것이 문화예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대룡산 너머에서 강물 위로 뜨는 보름달을  혼자보기가 아까웠다. 5월 보름밤이 되면 낭만적인 부부는 소박한 자택에서 ‘하우스콘서트’를 열어 지역의 예술가들과 지인을 초대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문화 나눔이었다. 그들이 위로 받은 만큼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웃동네 ‘꽃보다 더 예뻤던’ 아내와의 첫 만남은 전화수화기를 통해 시작되었다. 전선을 타고 노래와 함께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둘은 음악과 미술을 계기로 부부가 되었다. 그의 아내 박영미(60) 씨도 문화예술을 향유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소질은 없었지만 피아노, 하프, 플룻 등을 배우러 다녔다. 2000년 초 춘천시 자원봉사자센터를 찾아 가족봉사단 활동을 10여년 동안 남편과 함께 하며 인내와 감사를 배웠다. 지금도 문화관광해설사 일을 하며 늘 불안정한 가정경제를 이끌면서도 남편을 지지하고 미소를 잃지 않는 아내에게 신씨는 늘 감사하다.  

아내 박영미 씨와 함께 한 답사.
아내 박영미 씨와 함께 한 답사.

“제가 예술인도 아닌데 문화예술 판에서 자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은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했죠. 저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위로가 되었던 터라 마냥 좋았던 건데 말이죠. 좋아하던 것을 쫓아 다니다 보니 지적욕구도 커지더군요. 그 무렵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죠. 아내는 선배이기도 해요.”

인생 후반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14년부터 3년간 ‘한시를 품다’ 전을 기획하고 한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인문학강의와 답사 일정을 소화하고 전시를 했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판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이었지만 생각이 문화예술로 형상화되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춘천만이 갖는 고유함을 문화에 녹이고 싶었다. 그 고유함과 특별함이 춘천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만학도가 꿈꾸는 세계는 춘천의 문화예술 속에 역사를 녹이는 것이었다. 

“춘천을 제대로 알고 알리고 싶어요. 그게 공부를 하는 이유지요. 저와 아내의 고향은 서면이라 특히 애정이 가요. 어려서부터 서면에 대한 자부심이 저절로 생길만큼 어르신들께 듣고 자랐죠. 서면에서 이어져온 충의 맥은 고려시대 신숭겸으로부터 조선의 한백록, 홍재학 그리고 이준용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며 박사마을에 그 기운이 서려있죠. 석사논문에서도 신숭겸의 출생이 춘천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지역의 역사와 환경만큼 고유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차별성이고 경쟁력이지요. 지역의 정체성이 무시되는 축제들이 난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에 소소한 춘천의 역사를 스토리로 입히고 쉽고, 재미있고, 즐겁게 누릴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박사과정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원삼국시대의 맥국과 중도 선사유적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 외에도 춘천의 의병사(義兵史), 항일운동 연구와 춘천에 적을 두었던 사람들이 춘천에 영향을 끼친 사례들도 연구하고 싶다고 밝혔다. 역사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는 거의 쉬는 날이 없이 하루종일 연구실 의자에 앉아 있다. 노익장의 열의에 박수를 보내고 몇 년 후 열매로 나타날 그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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