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 지킴이 반경순 씨

춘천 광판리와 접해있는 홍천 북방면 구만리에서 뚝심 있게 마을을 지키며 활발하게 마을사업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반경순(61) 씨가 있다. 기나긴 골프장 싸움으로 집중 받기도 했던 구만리까지 가는 길은 남춘천 IC방향으로 가니 시내에서 채 20여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춘천 광판리와 접해있는 홍천 북방면 구만리에는 뚝심 있게 마을을 지키며 활발하게 마을사업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반경순(61) 씨가 있다. 기나긴 골프장 싸움으로 집중 받기도 했던 구만리까지 가는 길은 남춘천 IC방향으로 가니 채 20여분도 걸리지 않았다.

구만리의 지명은 아홉 구(九) 메 만(巒)으로 아홉 개의 산을 의미한다. 구만리에서 바라보는 팔봉산은 산이 한 개 더 보여 구만리라고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청동기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인돌과 효자문, 효부문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는 북방면. 이 고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반경순 씨.                                                      사진 이철훈 시민기자

구만리는 현재 100호정도의 마을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거제 반씨, 경주 이씨, 해주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400년 동안 대를 이어 온 동네다.

이곳에서 8대째 살고 있는 반경순 씨는 중학교까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농사가 꿈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춘천농고로 진학했다. 당시 그의 꿈은 축산이었다. 그 시절 젖소 2마리만 있으면 먹고 살기 넉넉할 시기였는데 소를 키우는 것이 공무원 생활보다 나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군대를 다녀온 것 말고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그는 1988년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04년 평창 올림픽 추진 당시, 강원도 내 골프장 43개 계획이 세워졌는데 마을사람들도 모르게 이미 땅을 사고 골프장 건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웃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땅을 팔았고 그 곳에는 이미 골프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때 그는 골프장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도대체 골프장이 무엇인데 우리 마을 땅을 사들이는 것인지, 골프장이 들어서면 마을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우선 골프장이 많이 들어선 수원, 용인, 양주 등 17군데를 답사했다. 그의 결론은 골프장이 마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을을 지켜야겠다는 굳은 의지로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아 골프장건립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물이 없어 농사에 애로사항이 많은 문제점을 건의해서 저수지를 만들어달라며 중앙정부에 건의하여 중앙정부자금으로 134억원을 인가받았는데 그 저수지도 골프장 사업 앞에선 힘없이 무너졌다. 생태계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저항뿐이었다. 오랜 투쟁에 가족의 반대는 없었냐고 물었다. 그의 아내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알아서 설득했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그가 마을을 위해 싸우며 알게 된 것은 구만리의 가치였다. 그간 몰랐던 많은 문화재와 역사를 공부하며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명분도 찾았다.

도청시위만 406일, 국회 앞 시위 등 오랜 시간 마을사람들과 힘을 합쳐 대항했고 마침내 골프장 직권취소를 얻어냈지만 이후 대법원에서는 패해서 아직까지 불안감은 존재한다. 결코 마을을 골프장으로 만들도록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란 의지를 여전히 굳건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14년 그는 마을공동사업을 시작해 법인을 만들어 공동경작으로 콩 농사를 시작했다. 그것과 연결되는 전통 장류 사업도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식당, 콩 농사,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장류사업에 공동으로 나섰다.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는 장보다 맛있고 저렴하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혼자 살았다면 자신은 재벌도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다 같이 잘사는 것이 그에게는 더 소중했기에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십 수 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인터뷰가 무르익어가던 중 점심시간이 되어 그가 안내하는 마을식당으로 갔다. 아직 행정절차가 남아있어 마을사람들끼리만 이용하고 있지만 곧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식당 안에는 마음씨 좋은 연세 지긋해 보이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직접 쑤어 썰어놓은 두부를 한 점 입에 넣어보니 고소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들깨 향과 어우러진 두부전골은 깊고 풍부한 맛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했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내어놓은 뽕잎 국수에 콩물을 부어 만든 콩국수는 아주 고소했다. 음식솜씨가 마을인심만큼 대단했다.

마을주민들은 2014년 구만리콩마을 영농조합을 만들어 공동경작으로 콩농사를 시작했다. 사진 제공= 반경순
마을주민들은 2014년 구만리콩마을 영농조합을 만들어 공동경작으로 콩농사를 시작했다.       사진 제공= 반경순

구만리의 장류들은 좋은 콩과 좋은 물로 만들어져 여러 생협에 납품되고 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하듯 그는 마을사람들의 반은 전과자라고 했다. 오랜 시간 투쟁하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골프장 측의 고발 등으로 법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고 했다. 퇴거불응죄, 공사방해죄, 특수공무방해죄, 집단상해죄 등의 죄명으로 법정에 서고 50여 명이 벌금형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신도 전과5범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순진한 마을사람들을 전과자로 만들 수밖에 없던 긴 여정의 법적 싸움이 눈에 선한 대목이었다.

그의 꿈은 마을에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질 수 있는 마을이 그것이다. 몇 년 안에 노인주간보호센터 등 노인요양시설과 젊은 층을 위해 귀농·귀촌 사업도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 사비를 들여 마을 이장님과 외국 탐방도 하며 마을설계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는데 한림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아들에게 권유하여 지금 그는 아들과 함께 인삼농사를 짓고 있다. 자신의 일을 물려주고 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정말 농사와 마을 지키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킬 마을이 있는가, 내가 자란 곳에 대해 이토록 애정을 갖고 살았던가, 그를 보며 많은 것이 부러웠다. 고향같은 뜸북새(뜸부기)도 계속 찾아올 수 있도록 아직 남아있는 골프장 문제가 하루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오래도록 그들이 사랑하는 삶의 터전이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란다. 

오늘도 그는 마을 곳곳을 둘러보며 마을지킴이로 임무를 완수하고 있을 것이다. 구만리에 식당영업이 시작되면 잊지 못할 고소한 두부와 콩 요리를 먹으러 가야겠다.

편현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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