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 요선동 권영돈 씨 편 - ③요선동의 삶, 요선동의 기억
[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 요선동 권영돈 씨 편 - ③요선동의 삶, 요선동의 기억
  • 홍석천 기자
  • 승인 2019.08.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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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동에 다시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어. 그때는 뭘 해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해냈단 말이야. 지금은 그런 게 없어. 다시 한 번 요선동이 들썩이는 걸 보고 싶어."

‘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은 교동, 근화동, 소양동, 약사명동의 옛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과거의 조각을 모으고, 오래된 도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춘천시 사회혁신센터와 함께합니다.

내가 춘천에 오니 그때 소양댐이 한창 공사 중이었고 요선동은 지금의 서울 강남 같았어. 그땐 술집이 엄청 많았지. 사창고개에는 사창가가 즐비했고 봉운장 아래 동네에는 양공주들이 많았지. 저녁이 되면 요선동 거리는 엄청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 밥 먹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은 거의 요선동에서 했어. 지금 인형극장 앞으로 이사 간 평양냉면집이 있었어. 점심에는 도청, 시청 공무원들이 거기 가서 많이 먹었지. 아마 그때 장사하던 사람들은 돈 좀 벌었을 걸? 요선동에는 지금 한국은행 건너편에 제일극장이 있었어. 춘천에는 육림극장, 소양극장, 문화극장, 제일극장, 신도극장, 남부극장, 중앙극장 등 극장이 7개나 있었거든. 지금은 그런 것들은 다 없어졌지. 한마디로 그때 요선동은 북적북적하던 번화가였어. 술집만 있었다는 것은 아니야. 저녁에야 술들을 먹지만 낮에는 옷가게니 신발가게니 생필품도 잘 팔리고 은행, 병원, 관공서가 다 모여 있으니까 살기 좋았어. 요선동 안에서 모든 게 다 제공이 되는 거야.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술 먹고. 돈이 도니까 그게 가능했지. ‘코스모스’라는 술집도 기억나. 아가씨들이 많았어. 마담이 우리 집에서 단체복 같은 걸 해가고 했어. 아주 호황이었어. 지하 룸싸롱이 요선동에만 7~8개 됐었어. 밤이면 사람들이 술 취해서 휘청휘청 거렸지. 인성병원 뒤쪽이나 지금 전화국 뒤로는 다 미군들이 다녔어. ‘레인보우’ 같은 데가 유명했지. 요선동은 공무원이 주로 다녔지. ‘팽고팽고’ 같은 디스코텍은 늘 손님들로 꽉 차곤 했어. 당시에는 공무원들이 자기 돈으로 술 안 먹었어. 건설업이니 뭐니 각종 업자들이 공짜 술 먹였거든. 그때는 흥청망청 별세상이었어. 80년대가 넘어가고 명동으로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전에는 요선동이 중심가였어.

그렇게 장사가 잘되어 돈을 좀 벌고부터 동네일을 하게 됐지 통장도 하고 15년 동안 했지. 새마을운동 때는 새마을지도자, 요선동 개발위원회 이런 걸 다 했어. 내가 누구를 고발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전두환 시절 삼청교육대 보내고 할 때 사회정화위원회 총무도 보고 했어. 주로 총무를 했어. 내가 똑 떨어지니까. 동네 나이 드신 분들 내가 많이 도와줬어.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이 다 좋아했지. 지금 그런 분들이 안 계셔서 내가 참 많이 외롭지.

그러다가 88올림픽이 지나고 중국하고 수교를 맺을 때쯤 관광 붐이 일어난 거야. 동네 사람들 데리고 관광을 많이 다녔어. 그때는 경기가 좋았어. 지금처럼 빡빡하지 않았지. 대만으로 해서 동남아 한 바퀴 돌고 홍콩도 가고…, 한 30명~40명씩 몰고 다니면서 관광을 시켰지. 그때도 다른 동네 사람들은 안 다닐 때야. 그런데 우리는 번영회하면서 눈을 떠가지고 다른 나라를 많이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지. 미국도 2번이나 갔다 오고 유럽도 갔다 왔지. 여러 번씩 갔다 오고 동네 사람들이 눈을 뜨고 하면서 차츰 춘천시내가 넓어졌지. 그때는 동네가 화합이 너무 잘 됐어. 재미있었지. 그렇게 춘천이 커지면서 구도심이 점점 장사도 안 되고 낙후되기 시작한 거지. 90년대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장사가 됐어. 2000년대 들어서면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

앞으로는 춘천이 좀 뭉쳤으면 좋겠어. 발전을 한다고 자꾸 옆으로 커지기만 하니까 서로 친근감도 없고 흩어지잖아. 다른 건 몰라도 옛날에는 사람들이 똘똘 뭉쳤다고. 개발 자체를 그런 식으로 너무 넓혀나가는 건 별로 좋다고 생각이 안 돼. 인구가 30만도 안 되는데 무슨 지구니 해가면서 다 흩어져서 살잖아. 누가 어디 사는지도 몰라. 앞으로 그건 좀 바꿨으면 해.

이야기를 마친 권영돈 씨의 표정은 마치 영화가 끝나고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의 얼굴 같았다. 그에게 요선동은 가장 빛났던 젊은 시절이었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춘천의 영광이었다.

제10회 1970년 통계연표에 따르면 1910년 인구 3천 명이던 춘천시는 1943년에 3만 9천 명, 1949년에 4만 1천 명, 1960년 8만 3천 명, 1965년 10만 1천명, 1969년 11만 2천 명으로 증가했다. ‘옥천, 중동, 봉의, 요선’동의 1천 664가구에 8천 555명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 중의 하나였다. 특별회계 결산액을 보면 1억 9천만원 가량(60.1%)이 ‘토지구획정리’비로, 7천 200만원 가량이(22.4%) 상수도 설치비로 사용됐으며 그 외에도 ‘동 개발’, ‘지붕 개량’, ‘주택’ 등의 항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춘천시가 양적인 팽창기였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제57회 춘천통계연보에 따르면 요선동 인구가 크게 줄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요선동이라는 법정동을 포함하는 소양동(행정동)이라는 넓은 구역의 인구통계가 과거 옥천, 중동, 봉의, 요선 보다 적은 6천 61명(2천 182세대)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영돈 씨는 요선동 거리를 걸으며 비어 있는 거리와 점포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는지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요선동에 다시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어. 그때는 뭘 해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해냈단 말이야. 어려운 일 있어도 서로 돕고 하니까 재미가 있었지. 지금은 그런 게 없어. 다시 한 번 요선동이 들썩이는 걸 보고 싶어.”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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