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하는 특별활동을 위해 동아리 하나에 가입해야만 했다. 아직 친구들과 친해지기 전이라 친구를 따라갈 일도 없었고, 딱히 하고 싶던 동아리도 없던 터라, 전부터 어머니를 통해 친분이 있었던 사회 선생님이 이끄는 동아리에 자연스럽게 가입하게 되었다.

그 동아리는 사실 초등학생 때부터도 웬만큼 형편이 넉넉한 집안의 친구들이 아니면 선뜻 가입하기가 망설여지는 곳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단복을 맞추는 데에만 교복 값 만큼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보이스카우트다. 새로 맞춘 교복에 구김살도 가기 전, 그만한 돈을 또 들였으니 속된 말로 ‘뽕을 뽑으려면’ 3년 동안은 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보이스카우트 활동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주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캠핑을 사시사철 했고, 여름에는 캠핑의 꽃인 잼버리가 열렸다. 잼버리에는 전국의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단원들이 참여하는데 캠핑뿐 아니라 스카우트를 위해 마련된 수십 종류의 레저 스포츠도 기호대로 즐길 수 있었다. 밤에는 수백 명의 스카우트 단원들과 함께 캠프파이어를 했고, 개중에는 또 풋사랑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잼버리는 매년 강원도 고성 잼버리장에서 열렸는데, 3학년 여름이 되자 주최 측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제주도였다. 2주 동안의 잼버리를 위해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난생 처음 제주도로 날아갔다. 완만한 한라산 산기슭에 순조롭게 캠프를 꾸렸고, 이대로라면 2주 동안의 잼버리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날씨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 오후부터였다. 날이 점점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잼버리를 축하해 주겠다고 서울에서 온 유명 가수들은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다음날이 되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텐트를 날려버릴 듯한 강풍까지 가세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태풍이 상륙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002년 한반도에 상륙해 124명의 사망자와 60명의 실종자, 5조 원의 재산 피해를 냈던’ 태풍 루사였다. 따지고 보면 남쪽에서 태풍이 북상하고 있는데 반가이 맞아주겠다고 손수 앞마당까지 마중나간 셈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텐트를 접을 수는 없었다. 그쯤에서 잼버리를 그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집행부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비를 입고, 비바람을 맞으며, 텐트가 날아가지 않게 반나절 동안 붙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했다. 텐트를 붙잡은 채로 누군가가 공수해 준 컵라면을 먹는데, 먹어도 먹어도 국물이 줄어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철수가 결정됐고 모든 스카우트 단원들은 비바람을 피해 일단 인근 학교 체육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잼버리가 취소됐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모든 항공편이 결항돼 버렸다. ‘영락없이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도 제주도에 온 지 4일째 되던 날, 선생님이 빨리 짐을 챙기라고 하신다. 태풍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비행기 한 대가 뜬다는 것이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 비행기는 김포공항이 아니라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제주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아주 가끔 있는데, 상황이 급박했던지라 김포공항, 인천공항 따질 새 없이 뜨기만 하면 올라탔던 것이다. 불운인지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2주짜리 잼버리는 없었던 일이 된 채 그렇게 4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태풍의 한가운데 있었던 기억은 나쁘지 않다. 비바람을 맞으며 들판 위에 서 있을 때 분명 어떠한 자유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끔 보슬비를 그냥 맞는다. 자유를 느끼고 싶어서일까? 

유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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