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동에 정착한 이유는 뭐, 없는 사람들끼리라도 모인 곳이 요선동이니까. 관공서도 다 여기 있고 해서 오게 된 거예요."

‘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은 교동, 근화동, 소양동, 약사명동의 옛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과거의 조각을 모으고, 오래된 도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춘천시 사회혁신센터와 함께합니다.

 

아버지 고향은 춘천이야. 춘천이지만은 일제 때는 돈을 벌려고 서울에 살고 있었어. 그런데 해방이 되기 직전에 일본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미국이 서울을 공격할 거래. B-29 폭격기가 와서 대대적으로 폭격을 할 거라는 거야. 총독부에서 그랬어. 서울을 완전히 재바다를 만들어 놓는다는 거야. 그래 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해서 다시 아버지가 44년도에 춘천으로 돌아온 거지. 아버지가 “만약에 죽어도 부모형제 있는 곳에서 같이 죽겠다”며 그렇게 오셨어요. 그러다가 해방이 된 거고. 나는 그래도 학교를 다니니까 어머니하고 서울 외가댁에 좀 더 남아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춘천으로 왔지. 48년이니까 2학년이든가 3학년이든가 그랬어. 첨에는 효자동에 살았어. 그러다가 51년에 요선동으로 왔어. 옛날에는 요선당이 있어서 요선당리라고 불렀대. 일제강점 때 왜식으로 고쳐놓은 게 요선동인 거지. 내가 37년생이니까 보자, 15살에 요선동으로 이사 왔구만. 남들은 피난 가는 판에 전쟁통에 요선동으로 온 거지. 하하하.

그렇게 초등학교 때 춘천에 전학을 왔어. 지금 중앙초등학교고 옛날에는 춘주국민학교였지. 춘추국민학교가 왜정 때는 일본사람만 다니던 학교였다고 그래요. 미도리 가꼬(새싹 학교)라고. 내가 왔을 때는 해방 이후니까 한국 학생들이 다녔지. 졸업해서 사범병설중학교를 졸업해서 학교선생님이 될 수도 있었어. 사범병설중학교를 졸업하면 자동으로 초등학교 선생 자격은 생겼거든? 그런데 그때는 쬐꼬만 애들 모아 놓고 손뼉 치면서 ‘하나, 둘, 하나, 둘’ 이러는 게 싫었어. 그래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갔어. 유학 간 거지. 그래 성동고등학교를 나왔어. 을지로 초입새에 있었어. 4가 5가 사이에 청계천 있는데. 지금은 어디 있나 몰라. 고등학교 다닐 때 한 번씩 춘천으로 오려면 서너 시간씩 기차를 탔어. 그때는 기찻길도 고개가 꽤 높았어. 올라가다가 힘이 달려서 못 올라가면 도로 뒤로 내려간다고. 그리고 얼마만큼 가서는 석탄을 열심히 때고 힘이 좀 생기면 ‘와다다다~’ 달려가서 고개를 넘곤 했어. 기차 삯도 없어서 몰래 내리다가 잡혀서 벌서고 했지. 그래도 그때는 다들 없이 살고 학생이고 하니까 벌만 좀 세우고 가라 그랬지. 어쩌다가는 통행금지 시간보다 늦게 기차가 도착할 때도 있어요. 그럼 팔목에 도장을 찍어줘. ‘어쩔 수가 없었다. 통행금지 위반이 아니다’ 그런 표시야. 그러면 그 다음날까지 일부러 도장을 안 씻어. 그리고 밖에 돌아다니는 거지. 하하하.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이상현 씨
이상현 씨

6·25 직전에 춘천이 어땠느냐. 수원, 청주, 전주, 뭐 이런데 하고 비슷한 규모였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3~4만 명쯤 됐을 거야.

6·25 직전에 춘천이 어땠느냐. 수원, 청주, 전주, 뭐 이런데 하고 비슷한 규모였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3~4만 명쯤 됐을 거야. 인구가. 정확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춘천시 통계연보에는 1943년 3만9천 명, 1949년에는 4만1천 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때는 수도권으로 빠질 때가 아니니까 강원지역에는 여기가 수부도시 노릇을 했다 하는 것이고. 6·25사변 때 춘천사람들이 거의 청주로 피난을 갔어. 우리 집도 갔고. 여기서 피난가면서 홍천에서 괴뢰군한테 포위를 당해서 산속에 숨어서 2~3개월 있다가 국군이 탈환하면 다시 움직여서 원주로 2차로 피난을 갔다가 그담에 3차로 청주까지 갔어요. 가보니까 청주가 여기하고 거의 비슷하더라고 시세가 말이야. 청주 시내에서 아마 한 4~5개월 있었을까. 당시 춘천 사람 행보가 거의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살만하다니까 몇몇이서 춘천으로 돌아왔지. 그때 요선동으로 말이야.

요선동에 정착한 이유는 뭐, 없는 사람들끼리라도 모인 곳이 요선동이니까. 관공서도 다 여기 있고 해서 오게 된 거예요. 도청도 있고, 경찰서도 있고 강원일보도 있고, 교육청도 있고…….  나야 중학생이고 하니까 아버지가 결정을 그렇게 하신 거지. 너도 벌거벗고 나도 벌거벗고 이러니 뭐 그냥 모여서라도 사는 거야. 사람이 모여 있으면 조그마하게 장이 서잖아? 그럼 이렇게 저렇게 물건도 구하고 의지도 하고 그런 거야. 그게 요선시장이지. 요선동은 그렇게 사람들끼리 의지를 하고 부대끼고 하는 곳이야, 처음부터가. 사람이 사람하고 비비면서 목숨을 지켜내고 가족을 지키고. 춘천의 번화가라고 하면 우습고, 뭐라고 할까…… 중심지였어. 사람이 있는 동네인 셈이지. 다른 데는 시골이었어. 괴뢰군 내려왔을 때 저쪽에 청와아파트 있는데 과수원에 숨었다니까.

재밌는 얘기 해줄게. 그때도요. 여기 핵폭탄이 터질 수 있다고 그래가지고 산에다가 토굴을 팠어. 일본에도 핵폭탄이 떨어진 전력이 있으니까 6·25때도 터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핵폭탄이 터져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1층 파고 2층 파고 3층까지 뚫었어. 이웃끼리 곡괭이로 말이야. 핵전쟁이 나도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하는 게 사람이야. 하하하.

홍석천 기자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