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육아’ 9년차 김을귀 씨

최근 아파트 단지의 어린이집 등하원차를 기다리는 모습 속에서, 놀이터의 미끄럼틀 앞에서, 벤치가 모여 있는 공간에서 손주와 함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사회에서도 대가족 속에서 아이와 조부모가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러나 핵가족 시대 맞벌이의 증가와 같은 사회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돌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과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과거의 조부모의 양육이 부모가 가끔 바쁠 때, 아이가 아플 때와 같이 보조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면 요즘은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로 강도가 높고 집중적인 양육을 수행하는 주 양육자로서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은퇴 이후 노년기에 육아를 한다는 말로서 ‘황혼육아’, 엄마나 아빠를 대신하는 ‘할마, 할빠’라는 용어도 일상화되고 있다. 이처럼 양육지원자이거나 전담자로서 나서게 된 조부모들은 체력적 한계나 시간 사용의 제한, 자녀와의 갈등 등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 사회적·지역적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올해로 9년차 ‘할마’로 살아가고 있는 김을귀(66) 씨를 만나 황혼육아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정확히 1년 8개월 전 원정 황혼육아를 위해 춘천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에 살며 맞벌이 하는 딸의 자녀들, 즉 손녀 둘을 봐주다가 춘천으로 발령 받은 딸을 따라 오게 된 것이다. 때마침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어 주거지를 옮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김을귀 씨.       사진 제공=김을귀
김을귀 씨.                      사진 제공=김을귀

어렸을 적 아버지를 일찍 여의긴 했지만 유복하게 자랐던 그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 직장생활을 했다. 자기 삶에 주도적이었던 그였지만 결혼과 동시에 출산과 양육을 하며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러다 학령기에 접어든 자녀들의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경제활동에 나서기도 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전문직으로 일하는 딸의 원만한 직장생활을 돕고 양육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처하여 황혼육아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심지어 육아를 처음 시작 할 당시에는 대장암 수술을 막 끝낸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딸을 위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주 양육자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우리 딸 결혼하고 내가 수술을 했어요.

근데 딸 입장 생각하니깐 내가 안 되겠더라고요.

우리 딸이 요즘에도 그래요. 엄마 적성대로 한을 다 못 풀고 살았다고.

그러면 내가 딸보고 그러죠. 내가 못 푼 걸 너라도 풀라고, 엄마가 애기를 봐주는 거라고.

그리고 내가 봐주면 딸의 마음이 편하잖아요.

딸이 할 일 하라고 그래서 딸 때문에 봐주는 거지 다른 거 없어요.

그는 주중에는 아예 딸의 집에서 지내면서 손녀 돌봄과 가사활동을 전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위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녀 주말에만 올 수 있었고, 딸은 업무량이 많아 야근이 잦고 퇴근해 집에 와서도 자주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일상은 소위 전업맘의 생활과 다르지 않다. 보통 7시에 일어나 딸이 출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침식사 준비부터 손녀들의 등교와 등원준비를 도맡는다. 낮 시간에는 청소, 빨래, 밑반찬 만들기, 마트 장보기 등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개인적인 볼 일을 본다. 손녀들이 집에 오는 저녁시간부터는 다시 아이들을 돌보면서 저녁밥 챙기기, 숙제 봐주기, 목욕, 재우기까지 하면 밤 10시가 훌쩍 넘는다. 

그는 자녀세대를 위해 자신의 노년기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황혼육아 역시 충분한 여가생활이나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고 육아와 함께 가사도 해야하는 점이 가장 큰 고단함이라고 했다. 그런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남편은 힘들어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그만두기를 몇 번이나 권했지만 그 때마다 그는 오히려 남편을 설득했다고 했다. 남편도 은퇴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손녀 양육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이제는 한숨 돌릴 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도 없이 지내야하고 때로는 주변 친구들로부터 손주를 키우는 일이 헛된 짓이라고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수고로움과 희생으로 손녀들이 건강하게 잘 커주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한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있기도 하다고.

힘든데도 재밌어요.

‘어깨가 아프네’ 하고 엎드려있으면 손녀들이 시원하게 밟아줘요.

그런 게 얼마나 이뻐요. 거실이 막 어지럽잖아요.

그러면 ‘할머니, 우리가 집안치우기 쿠폰 발행해줄게’ 그러면서 둘이 막 치워요.

그런걸 봐도 예쁘잖아요.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자신이 사회관계망의 단절을 감내하면서까지 타지에 와서 헌신적으로 손주를 돌보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딸은 고마운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한다고 했다. 딸에게 여전히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고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기도 했다. 

9살, 7살 두 손녀와 함께.사진 제공=김을귀
9살, 7살 두 손녀와 함께.사진 제공=김을귀

30여년 전에 자녀를 키울 때와 현재 손주를 돌보는 것의 차이에 대해 묻자, 자식은 욕심으로 키웠다면 손녀는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딸을 키울 때는 항상 공부를 잘해야 한다며 채찍질하기에 바빴지만 지금은 딸이 손녀를 붙들고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 걸 보면 오히려 말린다. 그저 손녀들이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서 남들에게도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인성이 바른 사람으로 성장하는 게 소원이다. 

황혼육아를 앞둔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조언해 줄 게 있는 지 물었다. 기왕 손주를 봐주기로 한 거라면 자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육아방식과 교육관을 존중하고 가급적이면 그것에 맞춰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육아방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마찰이 일어나고 결국 가족 간 관계만 멀어지게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덧붙여 조부모에게 손주 돌봄을 맡기는 자녀 세대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당부의 말이 있다고 했다. 부모님 세대에게 육아를 맡기더라도 가급적이면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은 덜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딸이 다시 서울로 옮겨가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딸이 서울로 가더라도 춘천에 남고 싶다는 마음이 60%정도로 기울었다. 연고도 없는 곳으로 황혼육아 때문에 오게 되었지만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노년생활을 보내기에 춘천이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노년기에 전원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미처 이루지 못했던 꿈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이 들기도 했단다.

자신이 어디에 살게 되든 손녀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계속 봐 줄 생각이다. 황혼육아가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묻자 다른 애들을 봐주고 싶다며 자못 놀라운 계획을 말한다.

일하는 엄마가 퇴근 전에 왜 한두 시간 동안 발을 동동 굴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내가 애들을 본 경험이 있으니깐 그 때 달려가서 봐주는 봉사를 하고 싶어요.

만약 내가 무슨 아파트에 살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죠.

어디 연결점이 있어야 할 수 있으니깐 동사무소를 통해 연락이 오면 봐주는 거죠.

내가 딸 사는 걸 봤잖아요. 그 입장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먼 훗날 자신의 손녀들에게 언제나 친구 같았던 할머니, 뭐든지 다 해주었던 할머니로 기억되고 싶다는 김을귀 씨. 장차 두 손녀의 할머니에서 동네 할머니로 황혼육아 경험을 확대하고자 하는 그녀의 발걸음에 존경과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미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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