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방동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무덤은 무엇보다 1인3분묘의 독특한 형태로 유명하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 나이 지긋한 춘천사람들에게는 학창시절 단골 소풍장소였다는 아련한 추억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젊은 청춘들에게는 즐겨 찾는 데이트 장소로 입소문이 나있기도 하다. 전국적으로 몇 대 명당자리라고 하는 말은 호사가들이 심심풀이로 붙인 것이기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지만, 춘천 시내는 물론 저 멀리 대룡산까지 한눈에 보이는 전경은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님을 누구나 느끼게 한다.

신숭겸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이바지한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황해도 평산을 관향으로 하사받아 평산 신씨의 시조이기도 한 신숭겸은, 927년 대구 팔공산에서 펼쳐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전황이 불리하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왕건의 활로를 열어주고 대신 목숨을 바쳤던 인물이기도 하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의 목을 베어가자 왕건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무로 머리를 만들어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역사서에는 기록돼 있다. 

(왼쪽) 1인3분묘의 신숭겸 묘역, (오른쪽) 신숭겸 제례 장면(2017년)       사진=춘천문화원 충의문화 아카이브

춘천을 장지로 정한 이유는 뭘까? 신숭겸의 고향이 춘천이라고 기록된 《고려사》를 근거로 당연히 고향에 장지를 정했다고 보는 설과 더운 날씨 탓으로 관향으로 하사받은 황해도 평산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인 춘천에 장사지냈다고 보는 설. 마지막으로는 풍수지리를 신봉하였던 왕건이 자신의 묫자리로 점찍어뒀던 곳을 신숭겸에게 양보하였다고 보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봉분을 3개로 만든 이유에 대해서도 도굴을 막기 위한 방책이라고 하는 설과 부인의 무덤을 함께 조성했다고 보는 설 등이 병존하고 있다.

 망주석, 문인석 등 다양한 석물을 동원해 조성된 조선시대 무덤과는 달리 무덤 앞에는 석상과 비석만 단출하게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그의 후손으로, 유신정권 시절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한 면을 장식했던 신직수란 분이 새로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1976년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묘역에는 신숭겸의 동상을 비롯해 사당 등 여러 부속시설이 건립돼 있는데, 눈여겨보아야 할 또 다른 문화재가 입구에 서 있다. 2009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155호로 지정된 <춘천 장절공 신숭겸 신도비>이다. 비석의 글은 신숭겸의 외손이자 순조(純祖)의 장인으로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기반을 열었던 김조순(金祖淳)이 지었고, 글씨는 조선후기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후손 신위(申緯)가 썼다. 신위는 춘천부사로 부임해 무덤을 관리하는 후손의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즈음에는 신숭겸 묘역을 찾아서 나라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시절엔 군주가 곧 국가였던 시기라 군주를 대신해 목숨을 바친 것이 신하의 당연한 책무였다면 지금은 국가의 시책을 잘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나라 사랑의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닐까.

춘천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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