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건축물 이름에 흔하게 보이는 ‘~정’, ‘~루’, ‘~대’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는 사실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루’는 ‘~정’에 비해 지면에서 꽤 높게 기둥을 세워 만든 2층의 다락구조라고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혼용하여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기에 명칭만으로 건물의 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단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그나마 ‘~대’는 ‘~루’나 ‘~정’과는 구별되는 변별성을 지닌다. ‘~루’나 ‘~정’이 건축물에 붙이는 명칭임에 비하여 ‘~대’는 건축물과는 상관없이 주변보다 높으면서도 비교적 평평한 지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춘천에도 ‘~대’란 지명이 붙은 곳이 있다. 바로 봉황대이다. 봉황대는 삼천동 옛 중도뱃터 옆의 작은 동산을 말한다. 전통시대에 춘천으로 들어올 때 석파령을 넘어 신연나루에서 배를 타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봉황대였다. 반대로 서울로 떠나는 객을 전송하며 술자리를 펼쳤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문헌에 춘천의 명승으로 소개되어 있거니와, 춘천을 찾았던 문인들이 읊은 시문도 다수 남아 있다.

1919년 봉의산에서 바라본 봉황대. 향로산으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이어지다가 강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이 봉황대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봉황대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지은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란 한시에서 따온 명칭이다. 금릉은 난징 부근의 옛 지명으로, 이백의 이 시는 두 강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풍광을 잘 묘사했다. 의암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소양강과 북한강이 이 부근에서 합류하였기에 이백이 바라본 풍광과 일치한다. 두 강이 만나면서 중간에 생겨난 섬 백로주, 구름이 허리를 감싸고 있어 꼭대기만 보이는 삼산 등의 지명이 이백의 시에 등장하는데, 소양강과 북한강, 중도와 삼악산을 옛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봉황대는 문인들의 문예 창작 공간일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평성대를 갈망한 춘천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인 지명이기도 하다. 이처럼 춘천의 중요한 공간인 봉황대는 의암호 자전거길의 명소가 될 것이란 기대하에 2017년 정비사업이 시행되었다. 접근로를 개선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봉황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민들로부터 제안받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추진한 민관협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도 한다. 

천 길 높이라는 과장된 표현도 있지만 정상에 50~60명이 둘러앉을 수 있다는 등 옛 문헌에 기록된 봉황대는 꽤나 웅장한 모습이다. 현재는 대부분 호수에 잠긴 채 야트막한 야산으로만 남아 그 위용을 느낄 수 없을뿐더러 새로 건립한 정자는 주변 경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느낌이다. 봉황대라는 의미를 굳이 건물로 형상화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춘천학연구소(26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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