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터view] 소리가 곧, 나지요
[人터view] 소리가 곧, 나지요
  • 이경애 시민기자
  • 승인 2020.11.30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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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이수자 소지영 명창

요즈음 영상 하나가 온 지구촌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관광유치를 위해 만들었다는 홍보물로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이 영상은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후, 현재 3억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영상의 배경음악은 ‘조선아이돌’이라 불리는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로 판소리 수궁가의 결정적 한 대목이다. 중독성 있는 비트와 찰진 판소리 가사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까딱거리게 하고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무성한 입소문에 궁금해서 한 번 듣고는 너무 재미가 있어서 몇 번을 다시 들었다. 역시 우리 소리는 흥겹고 철학적이며 해학적이고 자연스럽다.

여기서도 코로나 저기서도 코로나. 도무지 불안해서 걸음 떼기도 무섭고 누구를 만나자 하기도 민망하지만 조금 더 우리 소리를 알고 싶어 정통 소리꾼을 찾아갔다. 두 번째 만남이라 아직은 서먹하고, 시절이 하 수상하니 죄송한 마음도 들었지만 고맙게도 그는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이신 故 성우향 명창의 제자이면서 한국국악협회 춘천지회 교수 외 여러 가지 소리와 관련된 직함을 가지고 있는 귀한 사람, 소지영(58) 명창이다.

월정사 문화콘텐츠 행사의 한 장면.      사진 제공=소지영

그는 전북 남원, 춘향골 사람이다. 어지간히 엄격하고 꼿꼿하신 교장선생님(아버지)의 귀하디귀한 셋째 딸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라 소리를 한답시고 어지간히 부모님 속을 아프게 했다는 그는 탈속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인연은 절대로 억지로 이어지지 않아

“요즘 길고양이들 밥을 챙겨주고 있어요. 한 열 마리 정도 되는데, 이것들이 내가 아침 열시쯤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귀신같이 알고 울어대요. 밥 내놓으라고. 애들 밥을 주다 보니까 우리 삶이라는 게 참 별거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길지 않은 생,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마음 나누고 의지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천둥벌거숭이로 아무것도 모르고 나이만 먹어서는 섣부른 판단이 앞서 내 가정사로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절대로 억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사람도 나도 제 몫의 운명은 따로였던 것이지요.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영국으로 유학 가 있던 아들한테 전화를 해서 도저히 뒷바라지를 할 수 없으니 들어와야겠다고 하는데 참, 억장이 무너지고……. 급하게 들어온 아들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주먹 같은 눈물만 쭉쭉 떨구더라구요. 그러고서는 취업을 하더니 돈을 벌어다 주는데, 그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진학을 하라고 했지요. 지금은 대학에 다녀요.” 

“제가 유년시절에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사는 게 평탄하지만은 않아서 저 아래까지 내려가 보기도 했는데,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예요. 가끔 아들은 엄마가 가엾은가 봐요. 위로한다고 이런 저런 말들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말하지요. ‘이놈아, 그런 소리 마! 세끼 밥 무탈하게 먹을 수 있고 등 따시게 잠잘 수 있는 집이 있는데 엄마가 뭐가 불쌍해? 아프리카 같은 데 봐라. 굶어 죽는 애들이 천지여!! 엄마는 그런 애들 보면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죄 짓는 것 같아.’ 그래요.” 

평창올림픽성공개최기원문화제 공연 장면.   사진 제공=소지영

크게 별스럽지도 않고 그저 보통의 사람으로 자신의 일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는 어려서부터 여느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랬어요. 학교 다닐 때도 걷다가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풍경에도 무작정 홀리기를 잘했어요. 무덤 옆을 지나가면, 혼자 중얼거렸어요. 저 이는 어쩌다 저기 저렇게 누워있을까? 하면서 무심코 노래를 흥얼거리고, 짐승이나 새를 봐도 대화를 나누듯이 너는 왜 새가 되고 나는 사람으로 났을까?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어머니가 도장방(광)에 잠깐 들어가신 그 짧은 순간에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어요. 어른들은 아주 질색을 하셨지요. 집안 대대로 선비 집안에다 가풍이 책 읽고 공부만 하는 분위기였는데 나만 그랬어요. 중학교 졸업을 하고 예술고등학교를 가고 싶어서 도청소재지까지 가서 원서를 사 왔는데, 아버지가 기생 될 거냐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남원여고로 진학을 했는데, 운명인지? 교장 선생님이 우리 음악에 아주 관심이 많은 분이셨어요. 특별활동으로 가야금을 시작했어요. 그때 아버지한테 종아리 많이 맞았지요. 원래는 소리를 하고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한 날은 아버지께서 내 춘향가를 들으시고는 ‘좋다!’ 그러시면서 한 말씀 하시더라구요. 마을의 큰 어른이셨던 조부께서는 교육열이 대단하셨는데, 아들 등록금을 마련해서 직접 남태령을 넘다가 도적을 만나 몽땅 빼앗기고 돌아오신 적도 있었다면서 눈시울을 붉히셨어요. 춘향가 한 대목에 남태령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가야금을 하다가 그래도 노래가 하고 싶어서 남원국악원을 찾아갔어요, 무턱대고. 거기서 인간문화재 강도근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동편제의 거장이시고 흥보가의 명인이시지요. 선생님께서 ‘어떻게 왔냐?’ 그러셔서 ‘노래가 하고 싶어요.’ 했더니 아버지 도장을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받을 수가 있었겠어요? 속앓이를 하다가 한 열흘쯤 후에 다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그럼 한 번 해볼래?’ 하시면서 월사금은 얼마얼마다, 그러시더라구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이걸 배우면 10년이 되도 밥을 못 먹는다.’ 그러셔요. 그게 뭔 소린지도 모르고 무작정 좋아라고 시작을 했어요. 월사금은 남동생을 협박해 쌀을 훔쳐다 팔아서 냈어요. 그렇게 8개월 소리 공부를 하고 KBS 국악경연대회를 나갔는데 덜컥 2등을 하면서 방송을 타버렸어요. 난리가 났지요. 우리 아버지 노발대발하시면서 교장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때 교장선생님께서 나를 양딸로 달라 그러셨대요. 그때 또 종아리를 엄청 맞았어요. 그래도 자식은 못 이기셨지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 어찌어찌 연이 닿아 서울 사시는 성우향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남원에서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다녔어요. 방학 때는 아예 선생님 댁에서 살고. 우리 스승님은 엄마예요. 당시 국립국악원에 나가셨는데, 집에 오시면 밥해 먹이느라 분주하시고……. 그렇게 30년을 저를 키우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나를 ‘애기’라고 부르셨어요. 이젠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세상이 텅 비었지요. 집에 사진을 걸어두었는데 부모님 사진보다 더 위에……. 어쩔 때는 부모님보다 스승님들이 더 그립고 사무칠 때가 있어요.” 그의 눈가에 그리움이 이슬처럼 맺히는 것을 보았다. 

소지영 명창.    사진 제공=소지영

현재 춘천에서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강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소리 수업을 맡고 있구요. 집에서 레슨도 하지요. 서울 경기 쪽 제자들이 꽤 돼요. 그 제자들과 함께 ‘우리소리’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그래요. 한국판소리보존회 원주지부장활동도 하고 있구요.” 

이제 소리에 조금 눈 떴는데 스승님은 가시고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것 같은 사람, 그에게 소리는 무엇일까?

“제 삶이고 생(生)의 전부죠. 공부를 하다 보면 막히는 대목이 있어요. 그 대목을 가지고 며칠을 씨름하고 나서 스승님께 칭찬받을 때는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었어요. 공부가 잘 안 되면 정말 만감이 교차하지요. 이제야 겨우 소리에 눈을 아주 조금 뜬 것 같은데, 이젠 스승님들께서 안 계시네요. 소리는 우리의 뿌리이고 혼입니다. 지금은 자기 고국인 캐나다로 돌아간 라이언이라는 제자가 있었어요. 모 대학 국제학부 교수였는데 자기가 우리 소리를 배운다고 했더니 한국인 동료가 그런 걸 배워 뭣 하느냐고 했대요. 잔뜩 흥분해서는 ‘멍청이야, 멍청이! 이렇게 아름다운 자기나라 음악을 무시하다니!’ 그랬다더라구요. 씁쓸하죠? 모두가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 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스승께서 남긴 유언은 ‘우리 문화를 잊으면 뿌리를 잃는 것이다. 내 노래만은 지켜다오’하는 말씀이셨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제자들을 가르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세상일 같은 것은 모른다고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오직 스승의 그 소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죽으면 다 소용 없어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 보고, 맛있는 것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지요. 기자님, 운동 많이 하시고 건강하셔요. 그래야 저랑 오래 건강하게 얼굴 보지요!” 그의 진심 어린 한 마디에 마음 뿌듯하여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 서쪽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경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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