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늦은 점심을 하느라 음식점을 들렀다. 때가 때인지라 나와 내 지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다섯 여성이 들어왔다. 익히 잘 아는 영향력 있는 분들이었다. 웃으면서 인사하며 얘기를 건넸다. ‘춘천을 움직이는 다섯 자매시네요’라고 말이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 그런 분들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버릇처럼 다섯 자매가 등장하는 영화가 떠올랐다. 

아일랜드 영화 <루나사에서 춤을, Dancing at Lughnasa>(1998)는 여성이 남성의 다스림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가부장주의가 한창 위력을 떨치던 1936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의 척박하고 매우 작은 마을을 공간 배경이다. 영화에 다섯 자매가 출연하는데 모두 개성 강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단연 눈에 뜨이는 인물은 <철의 여인>(2011) <맘마미아>(2008)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등으로 잘 알려진 배우 ‘매릴 스트립’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교사이면서 가장으로 가족을 이끄는 큰딸 케이트 역을 맡았다. 아일랜드 시골 풍광과 너무도 잘 어울려 보이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찡하게 아려온다. 이유는 모른다. 

영화는 자매 중 막내이면서 싱글맘인 ‘크리스티나’의 아들 마이클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 관점에서 이모들을 관찰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프리카 선교 활동을 갔던 큰오빠 잭이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25년 만에 돌아오면서 평온했던 자매들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케이트는 지역 신부의 모략으로 학교에서 해고당한다. 

게다가 방직공장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뜨개질로 생활비를 보태던 셋째 아그네스도 하루아침에 일감을 잃어버린다. 아내가 도망간 유부남 대니 브래들리와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넷째 로즈는 케이트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일으키고 막내 크리스티나는 마이클의 아버지인 애인 제리가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괴로워한다.

이들에게 해마다 돌아오는 루나사 축제는 암담한 일상을 떠날 수 있는 일탈의 순간이다. 풍작을 기원하는 루나사 축제에서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춤과 음악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자매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춘다. 춤을 통해 여성만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분출한다. 여기에는 남자의 영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원작은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의 연극 대본이다. 그의 작품이 1990년 아일랜드에서 연극으로 첫선을 보인 후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브라이언 프리엘은 여성 연대의 힘에 초점을 두고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이 확대되어 1990년 로마 가톨릭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던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다. 

이쯤에서 ‘라스 폰트리에’ 감독의 영화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2000)나 레바논의 여성주의를 이끄는 ‘나딘 라바키’ 감독의 영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Where Do We Go Now?>(2011)가 연상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녀들의 춤을 통해 남성주의를 해체하는 동력뿐만 아니라 모든 억압과 얽힘을 풀어내는 해방의 힘을 감지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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