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대중과 음악]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그때 그 대중과 음악]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 김종현 (오랜 대중음악 애호가)
  • 승인 2021.01.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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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  (오랜 대중음악 애호가)

서양 음악사를 되돌아보면 20세기 성악의 시작을 알린 가수는 엔리코 카루소다. 많은 성악가의 음반이 재발매되고 있지만 1900년대 초반 축음기 시절 녹음되어 지금까지 발매되는 음반 중 카루소의 음반은 독보적이다. 세월이 지나며 귀가 트이고 여러 가수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가 얼마나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래전 카루소 음반을 들으며 아쉬웠던 점은 타 음반과 비교될 정도로 좋지 않은 음질이었긴 하지만 그 때 목소리 그대로를 들을 수 있었다. 

 엔리코 카루소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축음기와 녹은 기술 발달이 큰 요인이다. 축음기의 보급과 음반 녹음은 공연장을 찾지 못하는 일반인들 가정에 좋은 음악, 수준 높은 가수의 노래를 보급할 수 있었던 덕에 카루소는 고전과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슈퍼스타가 됐다. 

인류 최초의 음반 녹음은 카루소에 의해 1902년 세계적 음반회사인 EMI의 전신인 그라모폰사에서 이루어진다. 카루소 일행은 밀라노의 호텔을 임대해 호텔 방에서 아리아 10곡을 녹음하는데 요즘 흔한 마이크는 물론 전기적인 기술도 없을뿐더러 영화감독이 흔히 들고 다니는 메가폰처럼 생긴 집음기에 노래를 소리 질러 녹음하는 방식이었다.

절창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오래전에 불러 유명해진 노래 <카루소>는 그의 선배 ‘엔리코 카루소’를 가리킨다. 파바로티는 이 곡을 자신이 걷는 길도 존경하는 선배와 다름없다는 듯 절절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카루소를 떠올리게 한다. 후반부에서는 통곡에 가까울 정도의 기분이 밀려올 듯 멋지게 불러준다. 

노래 <카루소>의 작곡가 루치오 달라는 1980년대 초반 엔리코 카루소가 가족과 함께 묵었던 호텔을 방문하게 되는데 루치오는 평소 존경하던 카루소를 생각하며 나폴리만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피아노 앞에 앉아 이 곡을 작곡한다.

디지털 문명이 세상을 휩쓸고 있는 지금도 카루소는 굳건히 최고의 테너 가수로 많은 후배와 팬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가난한 노동자 출신에 변변한 음악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우연히 그의 미성을 발견한 교회 성가대 선생의 도움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된다. 변성기를 지났을 때 음역이 바리톤이었으나 성악가로서 성공하려면 테너라야 한다는 믿음으로 고음을 내는 연습을 하느라고 무던히 노력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무대에 오르기 전 작은 카페에서 민요와 유행가를 노래한 적이 있었는데 목소리는 볼륨이 있었으나 기교가 부족하여 손님들의 야유로 주인이 그를 해고한 아픔도 있었다. 그 후 오로지 독학으로 공부하여 22살 오페라 파우스트로 데뷔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워낙 우렁차서 극장 창문이 깨졌다는 전설을 낳은 위대한 테너로 20세기 전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열광시켰다. 

돈방석과 유명세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거액의 출연료는 카루소의 심적 부담을 더 크게 했다. 카루소는 낙천적인 성격이었지만 음악에서만큼은 ‘출연료에 걸맞은 훌륭한 연주를 해야 한다’라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에서 한 시즌에 한두 편 주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한둘 만 빼고 다 맡을 정도’였다. 정신적 육체적 소진으로 카루소는 너무 일찍 쓰러지게 된다. 카루소는 1920년에 공식 은퇴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였다. 그는 이듬해인 1921년 48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카루소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늑막염이었다는 사실은 성악가로서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혹사했나를 입증한다. 레코딩이라는 말이 생소하던 시절이었던 1900년대 초반, 카루소는 음반을 녹음할 때마다 자신의 영혼을 녹음기에 빼앗긴다는 생각에 항상 가슴에 성호를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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