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강원교육연구소 교육국장)

우리나라의 시낭송 역사는 50년이다. 짧게 잡아도 30년. 재능시낭송대회가 매년 열리기 시작한 해가 1991년부터다. 최근에는 1년에 110여 개의 시낭송대회가 열린다. 수상자 일부에겐 시낭송가 인증서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1년에 110여 명의 대상 수상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서너 배인 300~400여 명의 시낭송가가 배출된다.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까지만 한정해 계산해도, 1년에 전국시낭송대회 대상 수상자가 550여 명이고, 시낭송가 인증서를 받은 시낭송가는 1천500에서 2천여 명에 달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숫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시낭송의 시대가 도래할 듯하다. 월터 옹의 말마따나 제2차 구술문화가 대한민국에서 먼저 열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에서 ‘윤동주 시 읽기 모임’이 있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K-팝’에 이어 ‘K-음식’이 퍼진다는데, ‘K-시낭송’이 언제 뜰지 모를 일이다. 최근 김응교 교수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윤동주의 시낭송 동영상을 공모했는데, 그 열기가 대단하다.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간간이 시낭송이 나온다. 영화 <동주>에서 ‘별 헤는 밤’을 비롯해 윤동주의 시가 10여 편 나온다. 오래전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인육의 ‘사랑의 물리학’은, 2연 7행의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처럼 많은 시청자의 가슴 쿵쿵 울렸다. <키스 먼저 할까요>에 나오는 나희덕의 ‘푸른 밤’을 좋아하는 이는 참 많다. 감우성의 낭송이 애잔하다. 찾아보니 <시를 잊은 그대에게>,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비롯해 많은 드라마에서 시낭송이 나온다.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글쓴이가 춘천의 ‘베카랜드’라는 카페에서 2019년 8월에 개최한 그믐달시낭송콘서트에는 참가한 청중이 150여 명이었다. 그 이상의 관람객이 왔다가 서서 들을 자리마저 없어 되돌아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사실이다. 신문에 보도됐다. 관객 150명 참가했다고. 다른 신문에는 200여 명이 참석했다는 보도도 있다). 생각보다 시낭송을 좋아하는 민족인 듯하다. 이런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그동안 시낭송 관련 도서는, 1996년 송현의 《시낭송 잘하는 법》(1996)을 비롯, 김성우의 《시낭송 교실》과 그 개정판을 포함하여 재능시낭송협회의 《시낭송: 이론과 실제》(2002), 홍금자의 《시낭송의 즐거움》(2013)과 《시낭송 어떻게 할 것인가》(2015), 이혜정의 《이혜정의 시낭송 파워》(2015), 김남권의 《내 삶의 쉼표, 시낭송》(2015)과 《마음치유 시낭송: 시낭송의 이론과 실제》(2019), 반기룡의 《재미있는 시낭송 교실》(2016)과 《즐거운 시낭송 교실》(2017)과 《재미 흥미 의미 있는 시낭송 교실》(2018), 황봉학의 《시낭송 교본》(2019), 신승희의 《전문 시낭송 교실: 시낭송 이론과 실제》(2020), 한우수·서랑화의 《시낭송 내비게이션》(2020) 등 총 15권이 나왔다.

시낭송계는 이러한 성과를 이어 가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시낭송 관련 도서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비평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발전의 밑절미가 될 것이다.

시낭송을 학문적 틀로 접근하는 게 아직은 생소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휴지(休止, pause), 음운론, 어조, 액팅화술, 특히 앙리 메쇼닉의 ‘리듬(=프로조디, prosodie)’에 대한 제반 학문적 연구 성과를 시낭송에 접목해 이론체계를 세울 때다. 사실 늦었다. 시낭송의 과거와 현재를 톺아볼 때,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가 이론체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특히 음운론에 따른 완전장음/반장음/장고모음/보상적 장음/표현적 장음의 문제, 현대시의 리듬은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고 조직되는가, 띄어 읽기와 붙여 읽기, 발화의 프로세스 등은 참으로 시급하다. 에드워드 히르시가 말하길 “시는 노래와 말 사이를 거닐어 왔다.” 최소한 위의 네 가지를 구현해야 시낭송다운 ‘시낭송’이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시의 낭송은 사실 정형시로서의 노래도, 내래이션도, 이야기도, 구연동화도 아니다. 산문 읽기도 아니다. ‘말과 노래 그 사이’다. 그것은 시(詩)마다의 음운과 포즈와 리듬에 따라 읽었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선 시낭송을 하게 되면, 이는 마치 악보를 못 읽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시낭송의 새 지평을 열어 우리에게 다가올 시낭송의 르네상스를 마중 나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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