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나비소셜컴퍼니 CSV 디자인연구소장)

학교가 끝나는 오후가 되면, 하나둘 아이들로 떠들썩해지는 시간이다. 방학을 지나니 훌쩍 키도 크고, 점잖은 교복 차림에 신사숙녀가 되어 가는 모습들이 대견하기도 하다. 나비에서 함께 만나는 친구들은 발달장애가 있는 아동, 청소년들이다. 어려서부터 봐 온 아이들도 있고, 아들의 친구들도 있다. 이 녀석들은 나보다 키가 훌쩍 커져서 오히려 내려다보면서도 ‘엄마’, ‘이모’라고 부른다. 몸만 컸지 여전히 애교를 부리고, 살가운 실랑이도 하고, 사무실로 달달한 간식과 편지를 종종 배달해 놓기도 한다. 누가 누구를 키우는 건지 시간이 가고 생활이 섞여 가면서는 구분할 필요를 못 느낀다. 오히려 머리가 무거운 날엔 하던 일을 접고 아이들과 섞여 있으면 발바닥에 모터를 달아야 할 때도, 배꼽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할 때도, 기대하지 못했던 발견과 감동의 회오리가 몰려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나의 정서적 충전재는 온전히 이 친구들이 담당해 주는 셈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전공과에 진학한 학생들까지 나이도 다양하고, 각자의 개성도 말할 나위 없이 독특하다. 늘 톡톡 튀는 일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일상이지만, 서로 다른 친구들이 흔들리며 부딪히고, 맞춰 가는 변화들은 일상의 배움을 끌어 낸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은 형이니까 누나니까 동생들을 챙기며 가끔은 따끔한(?) 충고도 한다. 물론 모든 동생들이 기대에 부응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친구의 휠체어를 밀어 주는 것이 좋아서 서로 하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자신이 못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며 버럭하던 일들도 점차 줄어든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일 때 맞춰야 하는 ‘질서’라는 것을 분위기상 조절하는 눈치도 늘어났다.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잖이 불편하다고 짜증 내던 학생들은 이젠 같이 차를 타고 바깥 활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해낸다.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독특함을 발산하는 친구들이 있어도 시간을 나눈 사이에서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의젓함도 보인다. 지식으로 설명하고, 평가할 수 없는 것들이 온전히 몸으로 마주하면서 확인되는 장면들이란 나조차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이다. 한 뼘씩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자라는 것을 느끼면 기적처럼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끌어올리는 연결이 생긴다. 그런 경험을 통해 확인한 성장은 여전히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픈 가치로 작동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만나는 공간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학교 안에서도 특수학급과 통합학급(원반) 사이를 오가야 하고, 주로 복지관이나 재활치료센터가 주된 동선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의견이나 선택보다는 가족이나 주변 관계자에 의해 정해진 혹은 정해지지 않은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현실이다. 단순히 발달장애로 인한 의사 표현의 어려움이나 인지능력의 애로사항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기본적인 ‘존중’이라는 것의 결핍이 더 근본적인 상황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게 된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들의 자유로움을 감당하며 느긋한 변화를 기다려 주기엔 우리 사회가,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부족한 셈이다.

이번 호 민들레에서 비중 있게 다룬 ‘통합교육’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함께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0년, 유네스코의 《세계 교육 현황 보고서》에서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의 다름(difference)”이라고 주장하며, 100명의 학생 중 장애학생, 특수교육 대상자, 저소득층 가정 자녀, 성소수자, 이주자, 국내 실향민, 난민, 다른 인종이나 언어 혹은 종교적 소수집단 구성원, 농촌지역 거주자, 여학생 등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을 제시했다(43쪽).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반’, ‘정상’이라는 잣대 자체가 어쩌면 또렷하지 않은 채로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며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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