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보커터 / 김내훈 지음 / 서해문집 

편집증은 혐오의 디폴트(default)다. 혐오의 배후에는 셀프라는 편집증적 자아가 반드시 있다. 또 원한을 정의로, 혐오를 저항으로 착각케 하는 ‘뇌피셜’ 사례 집착증과 가학적인 ‘행복회로’가 반드시 있다. … 관심은 혐오의 대전제이자 초목표다. … 혐오의 인간은 관종의 한 유형이다. ‘좋아요’ 클릭이 아니라 상대방의 피눈물로 받아 낸다는 것이 다를 뿐. 그가 늘어놓는 평등, 정의, 안보 같은 공공선도 모두 빌미에 불과하다.(김곡, 《관종의 시대》)

주목과 관심에 환금성이 부여되는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의 시대가 도래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한 도 넘은 사회적 선넘기와 추태의 강도경쟁이 복제와 전송을 통해 무한 확장되고 있다. 긴장을 잃어버린 ‘선넘기’의 미학은 탈정치화되고 혼성모방(풍자나 비판의식이 결여된 패러디)의 소재로 전락한다. 

포로보커터(provocateur)는 도발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인터넷 등지에서 글이나 영상으로 특정인이나 집단을 도발하여 조회수를 끌어 올리고, 그렇게 확보한 세간의 주목을 밑천 삼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김내훈, 《프로보커터》)

정경심의 표창장 위조 주장의 근거를 묻는 대답에 “내가 아니까요”로 화답한 진중권은 실패한 말기적 프로보터커임을 자인했다. 문재인과 조국의 지지율 상승이 “잘생겨서”라고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 기생충 학자 서민은 몇 년 전까지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한국 남성 일반을 벌레 취급하던 자였다. 이들은 자극적인 언어로 도발하며, 이에 격하게 반응하는 최대한 많은 수의 ‘적’을 양산하고, 적의 적인 ‘우리편’을 확보한다. 보수언론은 이들을 차도(借刀) 삼아 휘두른다. 수위 높은 비방을 외주화하면 책임은 회피되고 조회수는 확보된다. 어뷰징은 확대되며 여론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어젠다를 접수한다. 처연히 아름다운 공생관계. 

여기 성공한 프로보커터가 있다. 예언하는 음모론자. 자칭 무학의 통찰자. 김어준. 거증책임은 피하되 공론장을 소란스럽게 만들어 민주당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결집시키지만 반대진영 설득에는 관심이 없는 무오류의 화신. 황우석 사태부터 세월호 고의 침몰설, 2012년 대선 부정선거 음모까지, 그의 입에서 ‘사과’를 들어 본 기억은 없다. 이른바 정치 종족주의(tribalism) 혹은 부족주의다.(강준만, 《부족국가 대한민국》)

얼마 전 민주주의의 천국이라 스스로 말하던 나라에선 돈 좀 있는 일개 프로보커터가 대통령선거에서 패하자 급기야 추종자들이 의사당을 점거하는 만행까지 벌어졌다. ‘그들’과 ‘우리’의 구별짓기보다 숙의(熟議)의 과정이 더 중요한 이유다. 세상살이가 인터넷만큼 빠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류재량(광장서적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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