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마을로 들어간 의사 양창모

우리가 마을, 또는 세계라고 말할 땐 어쩔 수 없이 경계를 떠올린다. 경계는 나누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진료실을 나와서 마을로 들어간 의사가 있다. 그가 만난 환자(사람)의 이야기는 곧 우리가 알아야 할 세계의 이야기일 것이다. 서면 인터뷰를 거쳐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로 보충했고, 끝으로 5월 5일 그가 자주 노을을 보던 자리에서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호방문진료센터 직원들. 좌측부터 양창모 의사, 최희선 간호사, 정윤후 케어메니저이다.출처=국립중앙의료원
호호방문진료센터 직원들. 좌측부터 양창모 의사, 최희선 간호사, 정윤후 케어메니저이다.      출처=국립중앙의료원

Q.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읽고 종군기자를 떠올렸다. 세계는 여전히 전쟁중이고 마을도 그렇다. 책 제목에는 당신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삶의 태도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인식은 늘 바뀐다. 상대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은 태도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내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 얼마 전 돌아가셨다. 녹색평론사의 김종철 선생님이다. 내가 만약 한 알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면 그건 내 가족 다음으로 《녹색평론》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종철 선생님과 《녹색평론》으로 만났던 분들을 통해 내가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다. 앞으로의 내 삶의 모습이 선생님이 살아왔던 모습을 닮아 가면 좋겠지만 그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삶에는 선생님의 삶이 깃들어 있다.

Q.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는가. 그리고 어디에 있었고 언제 춘천으로 왔는가. 

의사는 어쩌다 보니 되었다. 춘천에 온 지 벌써 12년이 되어 간다. 그 전에는 원주에 있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병원에서 4년 정도 일했었다. 시민들이 돈을 출자해서 병원을 세운 곳이다. 일종의 공동체 병원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이 내가 서울에서 수련 과정을 마치고 첫 번째로 찾아간 첫 직장이었다. 나는 아직도 원주의 조합원분들이 서울에서 갓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온 초짜의사를 환대해 준 기억을 잊지 못한다. 

2020년 겨울 눈이 많이 온 다음날 고탄 마을에 왕진가는 모습     출처=국립중앙의료원

Q. 우리는 세월호의 거리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체인지 춘천 모임에서, 방사능생활감시단에서, 그러한 여러 유사한 활동을 경유해서 친구가 된 것 같은데. 어느 날 당신이 사라졌다. 먼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이어 근무하던 병원에서도 사라졌다.

춘천에서 나름 열심히 시민사회 활동을 했다. 소수정당 활동부터 춘천방사능생활감시단까지 최선을 다해서 했다. A라는 집회에서 만난 분을 며칠 후 B라는 모임에서 만난 일도 여러 번이다. 그럴 때마다 서로 “가족들 얼굴 보는 것보다 더 자주 본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10여 년 활동할 즈음 벽이 내게 다가왔다. 그 벽은 사람(관계)의 형태를 하기도 했고 사건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육박해 오는 벽 앞에서 한동안 고민을 했다. 뚫고 나갈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모두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책에 간접적으로 씌여 있다. 어쨌든 모든 걸 내려놓고 나는 왕진 가방 하나 들고 시골 어르신들을 찾아가는 일을 그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벽이 문이 되는 순간이었고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이었다. 

Q. 그 경험을 통해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란 책으로 돌아왔다. 나는 ‘마을’이란 개념이 정책적 단위 사업의 유행어로 자리잡고, 거기엔 우리가 알고도 모른 체 하는 ‘쇼’도 섞여 있어서 때때로 불편했었다. 당신의 보고 느끼고 사용하는 마을은 실체적으로 만져졌고 나는 그것이 꽤 진실에 부합된다고 생각됐다. 

책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왕진의사로 돌아온 것이다. 책은 내 지나온 세월의 작은 결과물이다. 왕진 갔을 때 겪은 일뿐만 아니라 지난 20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내 가슴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얼굴들에 대한 얘기들이다. 어찌 보면 20년간 써 온 글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쓴 글이 아니라 일하면서 활동하면서 거리에서 논두렁에서 쓴 글이다. 마을이 하나의 상품이 된 지도 오래된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들 마음속에 마을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을에 대해 책에 언급해 놓은 것이 이제까지 내 고민의 결과를 응축해 놓은 잠정적인 결론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춘천시 동연 신이리 뱃터에 사는 환자와 고혈압 자가 혈압 측정에 대해 상담하고 있다.
춘천시 동연 신이리 뱃터에 사는 환자와 고혈압 자가 혈압 측정에 대해 상담하고 있다.     출처=국립중앙의료원

Q.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의 책갈피마다 절망 속에서도 짙게 진동하는 선의 향기가 있다. 그런데 나는 개인의 선, 혹은 연대하는 선이 다른 한쪽에서 치밀하게 계획되고 무관심 속에 진행되는 악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회의에 젖어들 때가 있다. 우리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선을 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당신은 600회 이상의 왕진을 다녔다. 대한민국 의사 중 가장 많이 남의 집 문지방을 넘은 사람으로서 나와 비슷한 좌절감은 없었는가.

공감한다. 어쩌면 우리는 어찌 달리 살 수 없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마음이 시키는 일이어서 그리 사는 것이다.

Q.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모든 국가수반은 아이를 낳거나 입양해야만 하는 국제법을 만들면 세상의 모든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읽고 모든 의사가 수련 기간중 얼마간 왕진활동을 해야만 한다거나 전문의가 된 후에도 1년에 1주씩이라도 왕진활동을 해야 하는 법이 있으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정확한 얘기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왕진에 대해 가장 무지한 게 어찌 보면 의과대학이다. 내가 처음 왕진을 갔던 게 18년 전 전공의 시절이었다.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분과 연락이 되어 쉬는 날 왕진을 갔었는데 그때 참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일단 뭘 가져가야 할지 몰랐다. 의과대학 다니면서 그리고 수련 과정에서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으니까. 환자분들 댁에 가서 어떤 점을 봐야 하고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진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배운 바가 없었다. 먼저 의과대학과 병원 수련 과정에서 왕진이 정규 교육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Q. 책 출간 후 더 바빠지신 것으로 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달라.

신문사 인터뷰, 방송 출연, 책방 북토크, 강연회 등 책을 내고 정신없는 일정들을 소화하는 중이어서 너무 여유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일들도 지나가는 것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내겐 퇴계동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환자분들이 있다. 병원을 떠날 때 가장 죄송했던 일도 그분들이다. 지금도 가끔 환자분들에게 전화가 온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그리고 오래 전부터 내가 해 보고 싶은 작은 모임이 있다. 바람 같은 이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 모임을 해 볼 생각이다.

Q. 그 모임에 나는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ㅎㅎ 마지막 질문.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가 춘천에 사는 사람이라면 더욱 당신이 바라본 노을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벽 앞에서 문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노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을 속에 양창모를 남기고 돌아오면서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늘 믿어 왔다. 한 사람의 이웃이 국가보다도 중요하다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이웃이 되면 안 되는가. 그런 질문들이 길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으며 나는 다시 왕진가방을 챙긴다.”

조창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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