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아니 전국에서 유일한 빙어 수출업에 종사하는 오항리 박민국 씨. 올봄도 소양호 어민들이 잡은 빙어를 가공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을 마쳤다. 그는 5월이면 빙어 비린내와 함께 밤낮을 일하고 5월이면 한숨 돌리는 소양호 어부다. 소양댐 건설로 삶의 터전이 수용된 후 어부와 전파상, 횟집, 그리고 빙어 가공 수출업까지…. 불편한 몸이지만 누구보다 건장한 삶을 살아낸 그를 만났다.

“내가 기구한 삶을 살긴 살았지만 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인터뷰에 적극 응하면서도 멋쩍은 미소를 비치며 인터뷰 장소에 들어선다. 그는 원두커피 한 잔을 들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며 아내에게 영상통화로 자랑을 한다. 약 7년 전 외롭고 몸이 불편한 그에게 천사처럼 다가온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모습을 그는 언제 어디서나 여과 없이 드러낸다. 원두커피를 좋아하는 소양호 어부 박민국 씨. 소양호 어민들이 잡은 빙어를 1차 가공해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정보를 듣고 사업 계기를 물었다.

“34년 정도 되었을 거야. 빙어 관련 일을 한 것이. 소양호가 생기면서 어부가 된 농민들이 많았지. 1980년대부터는 빙어가 아주 많이 잡혔는데 한국에서는 수요가 적었고 일본에서는 칼륨, 칼슘, 인 등의 영양가가 멸치보다 세 배 정도 높아 건강보조식품으로 인기가 많은 거야. 인제에 강 사장이라는 분이 그렇게 일본으로 수출을 했고 나는 어민들로부터 빙어를 사다 강 사장에게 배달해주고 배달비를 받았어. 트럭 한 대 값을 열흘 만에 벌었으니 벌이가 꽤나 좋았지, 일 년에 두 달뿐이었지만 말이야.”

7년간 배달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그도 북산면 추곡리에 가공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운은 그를 따르지 않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아 일본 수출이 중단되며 빚만 남겨졌다. 어떻게든 재기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었다. 물고기에 대해선 잘 알고 칼도 잘 다룰 줄 알았기에 그는 춘천 후평동에 횟집을 개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아갔다.

“정성으로 대하고 서비스를 잘해주니 손님이 점점 많아지더라고. 단골도 많아지고 새벽까지 손님들이 들이닥치는 거야. 어떤 날은 오후 다섯 시에 도마 앞에 서면 새벽 다섯 시까지 그 자리에서 회를 떴어. 그러니 4년 만에 부채를 다 갚게 되더라고. 왜 그만두었냐고? 술 때문이야. 난 술을 즐겨하지 않는데 단골들이 와서 한잔씩 주면 그걸 거절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래서 술 한잔하면 칼을 못 드니까 그만두었지.”

그즈음, 2000년대 초. 인제 강 사장은 빙어 가공수출 사업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일본 바이어들은 지속적으로 사업을 이어갈 사람을 수소문했지만 마땅한 이를 찾지 못했고, 어민 관리와 빙어 배송, 가공 등 모든 과정을 잘 아는 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신뢰를 한번 얻기는 어렵지만 이어진 관계는 쉽게 깨지 않던 일본 바이어들은 강 사장과 일을 함께했던 박민국 씨와 일을 지속하고자 했다. 그렇게 다시 오항리에서 빙어 1차 가공업에 뛰어들었다. 

음력 1월 1일부터 적어도 두 달간은 빙어와의 전쟁이다. 러시아 사람들을 여러 명 쓰고 있지만 빙어 수매부터 기계 일에 챙겨야 할 서류 등 그가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쉴 틈 없다. 그렇게 작업해 보내는 물량이 보통 50~80톤 정도라 한다. 소양호의 맑고 깊은 물에서 자란 빙어는 육질이 쫄깃하고 맛이 좋아 중국산보다 좋은 품질로 인정받는다. 일본 사람들은 반건조한 빙어를 수입해 ‘데리야키’ 같은 양념을 더해 건강보조식품으로 먹는다. 이렇게 판로가 확실한 매력적인 사업인데 경쟁업체 없이 유일한 업체라는 점이 의아했다.

“경쟁업체? 아니, 생기기 쉽지 않아. 일본 사람들 주문 맞추기가 워낙 까다로워야 말이지. 그 사람들은 새로운 모험을 안 해. 절차도 아주 확실해. 비용은 선입금하고 부산에서 물건을 선적하면 출금 수령 코드가 날아와.”

그는 물고기를 잘 잡는 어부이기도 하다. 2년 전까지 어촌계장을 지냈고, 현재 국토해양부 산하 환경지킴이로도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예전엔 하루에 빙어 수백kg을 배달했고 지금도 작은 공장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며 활기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사실 다리에 보조기를 달고 생활하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다.

두 살 때였다. 어느 날 찾아온 소아마비로 죽음의 문턱을 직면했었다. 누나의 증언에 따르면 젖도 못 빨고 눈빛도 꺼져갔다 한다.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건강해졌고 머리도 명석한 어린이로 자랐다. 하지만 부모님은 조교리 강가 집에서 16km 거리 ‘사전국민학교’에 입학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그의 소원으로 13세에 다섯 살 어린 동생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소양댐 건설로 마을과 학교가 수몰되기까지 4년을 다녔다. 그렇게 성장기를 보낸 마을은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눈을 감으면 그림이 펼쳐지듯 생생하다.

“굽이치던 강가, 백사장, 돌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이나. 마을 이름이 ‘용수목’이었고 오항리 지나 조교리 강가에 집이 있었어. 갑자기 마을이 수용되면서 보상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마을 이장에게 돈을 맡겨버린 게 실수였지. 15년 전이던가…. 소양댐 수위가 낮아져 ‘사전초등학교’ 부지가 드러났다 해서 가봤거든. 우리가 돌을 주워다가 하나하나 시멘트 발라 만든 꽃밭도 그대로인데 학교가 어찌나 작아 보이던지….”

댐 건설로 고지대로 이주한 후 소양호 위로 배를 몰아 물고기를 잡던 청년은 시골을 떠나 서울 등 대도시로 향했다. 궂은일도 마다 않고 떠돌며 일했다. 이후 춘천에서 장애인교육지원을 받아 전기 관련 기술을 배웠다. 1년짜리 과정을 아주 열심히 임해 6개월 만에 수료한 스토리도 그가 재주 많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교육 후 전파상에 취직해 월급 2만원을 받아 8천원짜리 양복 한 벌 해 입은 기억도 새록새록 하다. 그렇게 전파상 일을 하다 어느 날 인제 강 사장과 연결돼 빙어 배달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 열심히 공부해 익힌 기술은 지금도 유용하다. 빙어 건조기계를 머릿속으로 구상한 후 평생 익힌 기술들을 접목해 맞춤형 기계들을 만들었다. 건조과정중에 빙어가 서로 붙기도 하는데 떼어놓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최근 3단으로 건조기를 만들어 자동화를 구축하고 단점도 보완했다. 세상 유일무이한 기계를 직접 만들어 작업량은 줄이고 생산량은 늘린 효율적인 기계들이다.

그가 만든 공장의 기계들도 긴 잠을 자기 시작하는 5월은 여행기간이다. 고성을 출발해 부산, 진도, 인천을 돌아 2주 이상 긴 여행을 즐길 참이다. 정해진 일정은 없다. 그는 일단 마음이 가면 몸도 가는 게 여행이라고 말한다. 예쁘고 사랑스런 각시와 함께 아름다운 여행을 마치고 오항리에 당도하면 철 지난 쏘가리가 잡히는지 기별해봐야겠다.

유은숙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