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STORY] 나를 부르는 습관의 말, 형수(兄嫂)에 대하여
[SHE’s STORY] 나를 부르는 습관의 말, 형수(兄嫂)에 대하여
  • 지은희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 조직관리팀장)
  • 승인 2021.06.2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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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희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 조직관리팀장)

습관의 사전적 정의는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몸에 익은 채로 굳어진 개인적 행동이나 학습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되어 되풀이함에 따라 고정화된 반응 양식을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행동에 대한 우리들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괴물인데, 한편으로는 착한 행동에도 아름답게 옷을 입혀 몸에 딱 맞게 해주는 상냥한 천사”라 했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라면 전자의 습관은 부정적인 습관일 것이고 후자의 습관은 긍정적인 습관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습관은 괴물일 수도 천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태어나서 일정 시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체득되어 너무 익숙해 의심없이 쓰는 습관 속의 말들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은가? 그 말들로 정의를 내리고, 의식과 감정을 전달하며, 존재를 규정하면서 소통한다. 나를 부르는 말 가운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호칭은 ‘형수(兄嫂)님’이다. 남편 중심의 관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서로 이름을 부르던 연애 때와 달리 남편은 결혼 이후 나를 지인에게 소개할 때, ‘집사람’이나 ‘안사람’이란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쓰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집도 없으면서 매번 집사람으로 소개를 하냐”며 남편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나의 문제의식이 핀잔에만 머무르면서 남편의 후배들을 만나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형수님’이 되었고, 친구나 선배들을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제수씨’가 되었다. 고향후배, 동아리후배, 대학후배 등등 남편보다 나이 어린 모든 남성은 초면에도, 구면에도 하나같이 ‘형수님’으로 불렀다. 참으로 만만하고 익숙한 호칭이 아닌가.

시댁에선 남편이 둘째아들이어서였는지 시어머니를 비롯해 시이모님들까지 나를 ‘둘째’라고 불렀고, 제수씨, 형수님, 올케, 아주머니, 외숙모, 작은엄마 등 무수한 시댁 식구 중심의 호칭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듣도 보도 못한 시댁 어른들 앞에서도 나는 계속 ‘둘째’였다.

딸을 낳고는 급기야 나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친정엄마는 아직도 나를 부를 때 딸 이름으로 부르신다. 출산과 동시에 내 이름은 관습의 익숙함 속에서 오간 데 없이 주민등록증에만 남아 있게 되었고,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나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괴물에 승복한 채 질서를 깨지 않는 상냥한 천사로 살고 있었던 거다. 태어나 나의 존재를 증명하며 분신처럼 불려지던 이름이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있었다.

춘천으로 이사를 한 후로는 내가 이제껏 살면서 알고 있던 사람들보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같은 정당 안에 있었고, 시민사회 활동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남편의 지인이 나의 지인이 되었고, 그들에겐 난 계속 ‘형수님’과 ‘제수씨’였다. 습관의 말은 진보나 보수를 가리지 않고 존재를 남성 중심의 관계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게 했다.

내가 천사놀이를 끝내고 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춘천여성회라는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춘천여성회는 나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나의 정체성과 존재를 확인시켜주었고 내 삶의 주체가 나여야 함을 뼈저리게 일러주었다. 자존과 평등의 언어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존중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누구의 아내가, 엄마가, 며느리가, 형수나 제수가 아닌 인간 지은희로 존중하고 인정해준 내 인생의 공동체인 셈이다.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름 없는 풀이 없는데 하물며 이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름은 다름 아닌 존재 가치나 의의(意義)를 뜻한다. 이름이 주어짐으로써 사물은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되고, 의미를 얻게 됨으로써 존재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임에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니까….

일상의 평등. 습관의 말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형수님도 아닌, 제수씨도 아닌 ‘지은희’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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