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탄 피해자 나환목 씨

1966년 2월 19일, 지금의 영주시는 당시 영주군으로서, 시로 승격되기 이전이었다. 영주읍의 소백산 자락의 영주군 강동면 창진리 마을 아이들은 하교중이었고 야산에서 방망이처럼 생긴 쇳덩이가 발견되자 호기심으로 열댓 명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터질 때까지도 전쟁의 무서움과 불발탄의 공포를 몰랐다. 6·25 종전 13년 후, 그 작은 물건이 창진리 마을 아홉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고 다섯 아이에게 중상을 입히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그날 현장에서 두 다리를 잃은 나환목(66) 씨를 만났다. 1970년대 말 춘천으로 이주해 1980년대 사회과학도서 전문 서점 ‘춘천서림’을 운영하고, 장애인의 실질적 고용을 목표로 한 제조업체 ‘함께하는 세상’ 운영자로서 많은 난관을 겪기도 했던 사람이다. 인터뷰 장소에는 함께 살고 계신 95세 노모와 함께했다. 며칠 전, 점심을 먹으러 마산까지 함께 가시고 나들이를 즐겨하실 정도로 건강하지만 두어 시간씩 혼자 있게 할 수 없다며 허리 굽은 노모를 인터뷰 장소에 함께 모시고 온 모습이 따듯했다.

6·25전쟁 후 남겨진 불발탄 피해자 나환목 씨. 불편한 몸으로 서점과 장애인고용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 당일 또 한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 끔찍한 폭발 사고 당시 양쪽 다리를 잃은 중상자였으며 1985년쯤부터 춘천에서 의수족 제작을 하고 있는 강병철(67) 씨다. 두 사람 모두 왕성한 나이에 두 다리를 잃었다. 그들이 지나온 길들이 상상도 못 할 만큼 고단하였을 듯하여 그때의 심경을 조심스레 물었지만 무던한 세월을 보낸 듯 강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는 뭐 정신없었던 거 같아요. 청소년 시기였지만 두 다리를 잃고 어려운 집안에 천덕꾸러기가 된 거 같아 되레 눈치를 봤지요. 마음도 몸도 너무나 힘들었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려 했던 적도 있었고…. 의술도 지금처럼 뛰어나지 않으니 저는 회복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위로를 받기보다 자신들의 실수로 장애인이 되어 가족에게 짐이 될까 눈치를 보았다는 입장은 나 씨도 같았다. 

“다리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름 하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나마 아버지를 도와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학교도 멀어서 갈 수 없었고…. 당시는 그랬어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 같지 않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죠.

나는 몸이 고달파 정신적으로 힘들어할 여력이 없었어요. 의족을 끼고 있는 거 자체가 얼마나 큰 피로감을 주는데요. 전쟁은 정말 없어져야 해요. 전쟁과 상관없이 우리 같은 피해자가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지나요. 2층에 아무리 좋은 산해진미가 있어도 우린 못 먹어….”

보상제도도 냉혹했고 알지도 못했다. 주위에서 누구 하나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아홉 아이를 데려가고 다섯을 장애인으로 만든 큰 사건이라 언론에 보도됐지만, 제도적 지원과 보호는 받지 못했다. 학교와 이웃들이 십시일반 조금씩 모아 병원비를 보태었다. 세월이 변했으니 지금이라도 보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뢰 및 불발탄 피해자가 전국 6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최근 평화나눔센터에서 전국 피해자들을 찾아냈고 피해자 지원법 개정을 통해 지금까지 전무했던 보상도 이뤄지려 하고 있어요. 반가운 소식이고 하루빨리 진행되면 좋을 거 같아요”

6·25 전쟁 때 북한의 기습을 막기 위해 매설된 지뢰는 100만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평화나눔센터에서 2020년 전수조사로 찾아낸 피해자가 2천884명이라 한다. 지난 4일에15도 고양 장항습지에서 지뢰가 터지면서 환경정화작업을 하던 50대 작업자가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하루빨리 대책이 마련되고 지뢰법이 개정되어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길 우린 함께 바랬다.

장소를 옮겨 춘천에 정착하게 된 그의 스토리를 이어갔다. 그의 형이 1970년대 후반 강원대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가족이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서 춘천에 정착했다. 학비를 벌어야 했던 형이 분식집을 차렸고 카운터 일을 보게 되면서 강대생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춘천서림’이라는 사회과학도서 전문서점에 발을 딛게 됐다.

1966년 2월 불발탄 사고 당시 함께 현장에 함께 있던 강병철(오른쪽) 씨 또한 두 다리를 잃는 부당을 당했다. 현재 후평동에서 의수족 제작업을 하고 있다.

“형이라면서 따르는 강대 동생들이 여럿 생겼는데, 형 노릇을 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딱 네다섯 살 정도 많으니까…. 1986년엔 하광윤 씨가 하던 ‘춘천서림’ 운영을 맡게 됐어요. 도서 판매 매출도 좋았는데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보급되고 사회과학도서들이 조금 외면받으면서 책 구매율이 낮아지더라요. 1997년 초에 ‘춘천서림’ 문을 닫게 됐는데, 그 많은 사람들과 사연이 있던 서점 문을 내 손으로 닫게 된 것에 부담이 참 컸고 마음 아팠어요. 그때 그 자리가 지금의 나를 요만큼이라도 만들어준 거지….”

장애인 공용업체 ‘산천제지’를 설립한 고(故) 이병길 대표와 함께한 경험도 장애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준을 확장시켰다. 특히 이 대표의 철학에 크게 동조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산천제지’를 만들면서 장애인 공장의 성지로 만들어보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가능성 있던 친구죠. ‘안 되면 되게 하라’, ‘법? 바꾸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한 친구예요. ‘장애인, 노인, 임산부를 위한 편의시설’을 제도적으로 만들어가던 사람이에요. 장애인협회는 실질적인 일을 하고 사업을 하라고 외치던 사람이죠. 그런데 실제로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가 직접 공장을 운영하겠다고 선포했죠.”

2003년, 나 씨와 이 대표는 그렇게 화장지와 복사지를 생산하는 장애인보호작업장을 세워 5년 만에 88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건장한 회사로 키웠다. 이익금으로 장애인에게 급여를 지급할 여력까지 생겼다. 그러나 건물과 보조금을 지원하던 춘천시는 3년간 사용한 업무추진비 1억2천만원에 대해 횡령이라고 보고 끈질긴 싸움을 걸어왔다. 이 대표는 대표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자 법정에서 기나긴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업체를 설립해 다시 재기를 꿈꿨지만 2015년 자신의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이후 나 씨가 임시대표직을 맡으며 업체를 살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함께하는 세상’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할 때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투자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성공 가능성도 있었죠. 기준에 합당한 기업이 되고자 절차를 밟는 사이 손실은 커졌고 노력을 해도 잘 안 됐어요. 도와준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 정말 끝까지 살려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내가 부족했던 거 같아요.”

함께했던 장애인, 그를 도와주고자 모든 것을 바친 지인들,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시설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의 표정이 또다시 어두워졌다. 사업을 정리한 지 5년이 지나도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들이 무뎌지지 않은 듯했다. 

그는 아무런 잘못 없이 하루아침에 전쟁의 피해자가 됐다. “전쟁은 정말 없어야 한다”는 말이 어떤 누구의 목소리보다 깊이 박힌다. 사고 이후 50년 동안 냉정했던 국가적 보상제도가 진행단계에 있다니 안타깝지만 다행이다.

보상 문제가 해결되면 또 95세 노모와 마산에 점심 먹으러 다녀오면 좋겠다. 그의 소중한 동생 고(故) 김용래 님이 ‘춘천서림’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모금운동을 벌여 마련해준 자동차를 타고.

유은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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