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트막한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강원도에서 이런 고개는 귀엽다. 식은 죽 먹기다. 자전거를 타고 기어 변속도 없이 단숨에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름이 있을 것 같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다음을 위해 궁금증을 남겨둔다. 고개를 경계로 오른쪽은 방하리고, 왼쪽은 조그마한 산이다. 북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천연 방풍림이다. 이 산 이름도 아껴둔다. 고갯마루부터 연달아 서있는 간판이 눈길을 강제로 잡아끈다. 카페, 펜션, 리조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화려하고 커진다. 아름다움보다 충격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변해간다. 언제부터였는지 북한강변은 자본주의의 최첨단이 됐다.

간판들 너머로 남이섬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다. 남이섬은 원래 방하리에 붙어 있다가 큰물이 나갈 때만 섬이 되곤 했다. 그러다 청평댐이 만들어지면서 이름에 걸맞게 섬이 됐다. 섬 북쪽 언덕에 남이장군의 묘라고 전해오는 돌무더기가 있어서 남이섬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다산 정약용도 남이섬이라 했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지 꽤 오래 됐다.

남이(南怡) 장군의 삶은 너무 짧은 단편소설이다. 그는 용맹이 특별히 뛰어났다.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여진족을 정벌할 때 선두에서 싸워서 일등공신이 됐다. 세조는 남이 장군을 몇 단계나 건너 뛰어 병조판서로 임명했는데, 당시 세자이던 예종은 그를 몹시 꺼렸다. 예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마침 혜성이 나타났다. 대궐 안에서 숙직하던 남이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다가 “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배치하는 형상이다”라는 말을 했다. 평소에 남이의 재능과 벼슬을 시기했던 유자광이 그 말을 엿듣고, 거짓을 보태 남이가 반역을 꾀한다고 은밀히 고해 바쳤다. 옥사가 일어나 마침내 남이가 처형되었으니, 그때 나이가 28세였다. 1468년의 일이라고 『연려실기술』은 적었다. 세월이 지나 남이 장군의 역모사건은 유자광의 무고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1818년(순조18)에 관작이 복구됐다.

강물 가에 꽃 피운 풀뿌리는 물에 잠겼고 / 芳洲細草水沈根
남이 장군 자라던 마을 아직 있는데 / 生長南怡尙有村
언덕 위 쓸쓸한 천 그루 밤나무는 / 岸上寂寥千樹栗
다시 이씨(李氏) 땅이 되었네 / 如今還作李家園

정약용이 남이섬을 지나다가 시를 지은 해는 1820년. 남이 장군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28세에 관직에 나가면서부터 정조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늘 기회를 엿보던 반대파는 다산의 나이 마흔에 장기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시켰다. 다산은 18년을 보내고 1818년이 되어서야 고향인 마재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아무 일 없는 듯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만 속마음은 심하게 요동쳤을 것이다. 동행하는 사람 몰래 눈물을 훔쳤는지도 모른다. 잠시 배를 멈추고 남이 장군을 위해 술을 올렸으리라.
남이섬은 봄을 맞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봄비가 많이 내렸는지 꽃만 물 위에 떠있다. 아래는 물에 잠긴 것이다. 눈에 보이는 꽃은 그나마 다행이다. 보이지 않는 많은 꽃들은 아름다움을 뽐내보지도 못하고 물에 잠겨버렸다! 환갑을 눈앞에 둔 정약용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뱃전을 스쳐가는 바람처럼 무심한 듯 그렸다.

지금 메타세콰이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가 남이섬을 꾸미고 있다. 예전에는 밤나무가 많았던 것 같다. 울창했을 천 그루의 밤나무가 쓸쓸해 보인 것은 권력의 부침에 따라 소유주가 바뀌는 무상한 현실의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남이섬은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2006년엔 나미나라공화국으로 변신해 관광천국이란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강 바람은 이 공화국이 친일파 민영휘 후손의 소유라고 들려준다. 쓸쓸한 메타세콰이어는 21세기의 자화상이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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