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만세] 가난에 대한 기억
[청년 만세] 가난에 대한 기억
  • 이효성 (전 정의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 승인 2021.09.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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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 (전 정의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나는 유년 시절 넓은 마당이 있는 양옥집에서 살았다. 부모님 사업이 번창하던 시기였다. 앞마당에는 텃밭, 꽃밭이 있었고, 뒤뜰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마당 한켠엔 은행나무와 감나무도 있었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997년, IMF가 터지면서 부모님 사업은 어려워졌다. 우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처음 살았던 곳은 방 한 칸을 억지로 두칸을 만든좁은 곳이었다. 봉지 쌀을 사 먹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수쟁이가 찾아왔다. 긴장했는지 소화가 안 되어 일주일에 이삼일은 꼭 체했다. 두 번째 집은 시장통 뒷골목이었다. 해가 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고, 습해서 벌레가 많았다.

세 번째 살았던 곳은 그나마 집 같은 집이었다. 부모님께 빚진 분 중 한 분이, 돈 줄 형편은 안되고 대신 서류상 무언가가 막힌 빈집이 있는데 거기라도 살려면 살라고 했다. 역시나 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보일러와 가스레인지를 쓸 수 없었다. 사업의 출구를 찾지 못한 아버지는 돈을 벌러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어머니도 돈을 벌러 서울로 떠났다. 이후 형과 둘이 살았는데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뭐 해 먹고 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형도 대학생이 되면서 이곳을 떠났고, 나는 이곳에서 혼자 반년을 살았다. 추운 집,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더 추운 집에 참 들어가기가 싫었다. 평일엔 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고, 주말엔 종일 교회에 가 있었다. 

고2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날 무렵, 서울에 간 어머니가 시장통 아파트에 방을 잡고 나를 불렀다. 서울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단칸방에서 같이 지냈다. 이사를 더 다녔는데 너무 자주 다녀서 다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짝이 당시의 내 방을 기억해냈다. 그를 처음 만난 29살의 겨울, 나는 그에게 관같이 좁은, 추워서 김 서리는 나의 옥탑방을 보여주었다. 무슨 배짱으로 거기에 그를 데려갔나 모르겠다. 그는 독립을 위해 20대 내내 열심히 돈을 모았었다. 나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는 반전세 방을 구했고 나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혼집을 차렸다.

나는 가난을 부끄러워했다. 청소년 시절 내내 나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친구들에게 후진 우리 집을 들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친구와 같이 하교를 할 때면 집이 아닌 근처 골목에서 헤어지고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짝을 만나고부터 나는 가난에서 점차 벗어났다. 결혼 후에도 여러 차례 이사했지만, 그가 마련한 초기 목돈과 그의 알뜰한 가계운영 덕에 지금은 나름대로 괜찮은 곳에 산다. 나는 짝을 만나 가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는 그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생활환경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짝에게 미안하다.

내 노력이 아니라 운이었다. 하지만 사람 대부분에게 이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살아갈 희망이 보였는데 요즘은 희망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땅값, 턱없이 부족한 양질의 일자리, 비교와 경쟁이 첨예한 사회에서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은 더 나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 양극화가 이제는 너무 당연해져 버린 느낌이다. 

가난에 민감한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가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나는 지금 가난하지 않지만, 여전히 가난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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