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시민기자 (시인)

나는 지금도 그녀가 지내는 안방과 명준이가 지내는 건넛방 사이의 넓은 대청마루가 눈에 선하다. 콩기름이라도 발랐는지 늘 광택이 났는데 문제는 햇빛을 받아 생긴 광택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종일 햇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해 어둡게 그늘져있는 상황에서 나는 차가운 느낌의 광택이었다. 위의 가로질러진 대들보와, 안방의 하얀 창호지문 상(像)이 늘 어려있는 어둑한 광채. 

내가 명준이를 추워 보이는 아이라고 느끼게 된 주 원인은 그 대청마루가 아닐까. 광택에다가 넓기까지 한 그곳에서 단 한 번도 뒹굴러 노는 일 없이 자기 방에서만 조용히 지내던 아이였으니까.  

무심 이병욱 작가의 두 번째 단편 소설집 《K의 고개》에 수록된 7편의 단편 중 유독 무겁게 읽힌 <추운아이 명준이>.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화자와 동갑내기들은 이 사회의 도식적인 계층 상중하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독재정권 하에 고달픈 생의 여정으로 대표되는 아이. 추운 아이는 결국 제 이름을 버리고 불우한 청년기를 지나 노숙자로 살게 되었나 보다. 한 아이는 중산층 교육공무원, 마지막 한 아이는 대통령이 되었다.(소설에선 여기까지만 언급하였다.) 그 대통령이 예견된 파면을 당하게 된 건 소설 밖의 일이다. 1979년 가을, 나는 대통령 서거 검은 리본을 달고 학교에 다녔고 얼마 후 시골로 이사를 왔다. 1980년의 광주를 알 수 없는 시골이었다. 명준이의 대청마루보다 더 차가워 보였던 그 애의 푸른 가림막이 눈에 선하다. 그 애는 어디서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을까. 

서너 채가 세를 살던 마당이 넓은 집. 우리는 식구가 많아 주인집보다 큰 안채에 살았고 주인집은 두 칸짜리 작은 골방이 있는 모퉁이 별채에 살았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허름하고 어둑한, 낮은 지붕의 집. 동굴 입구 같은 현관을 지나면 집주인 부부의 방이 나오고 한쪽 그 애의 방은 반질반질한 푸른색 가림막이 쳐있었다. 그 애는 나와 동갑으로 전교 1, 2등을 하던 아이였다. 형편없는 성적표에도 혼나지 않던 나와 달리 그 애는 일등을 놓친 날이면 아버지에게 여지없이 종아리를 맞았고 나는 푸르스름한 가림막 안에서 종아리 맞는 그 애를 상상했다. 사십 년이 흐른 어느 날 엄마와 옛이야기를 나누다가 회초리를 든 키 큰 집주인 아저씨보다 회초리를 빼앗는 작고 땅땅한 아줌마가 더 무서웠던 것과 그 애가 한바탕 울고 나면 안티푸라민 냄새가 진동하던 저녁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애에 대해 몰랐던 비밀 하나. 나이 많은 집주인 부부는 원래 아이가 없었다. 누군가 업둥이를 대문 앞에 놓았고 손자뻘 되는 그 애를 입양했다. 노부부는 많은 재산을 지키려면 똑똑해야 한다며 유독 엄하게 키우려 했다. 그 애는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웠지만 나는 이상하게 두 줄 이상을 못 외더라는 것과 불법 과외를 똑같이 시켰는데 그 애는 일등을 하고 나는 아무 소용도 없더라는 얘기. 푸른 가림막 사이로 우리는 모두 추운 아이들이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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