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소녀들, 유리천장을 깨다 / 설흔 글 / 단비 / 2021

이야기는 제목에서 시작한다. 《조선 소녀들, 유리천장을 깨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편견을 깨고 세상과 마주한 이들이 시대적 한계 속에 지워진 조선 여성들을 대변한다. 이름을 부른다. 이숙희, 석개, 이옥봉, 장계향, 박향랑, 임윤지당, 김금원, 신사임당, 허난설헌. 명확한 이름과 더러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이들의 용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다. ‘졌어도 잘 싸웠다’는 말이 있다. ‘끝까지 싸웠다’라고 바꿔 부르고 싶다.

글을 배우고 싶다고 먼저 요청하며, 모호한 부분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이숙희. 자신의 노력으로 예술적 성취를 거둔 석개. 이웃을 위해 기꺼이 시 쓰는 재주를 발휘하며 생의 기쁨을 발견한 이옥봉. 한숨에서 그치지 않고 삶의 불공평성을 직시해 봉사하며 실천한 장계향.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신의를 지키며 부당함에 항의한 박향랑. 화평한 덕성과 솔직한 문장을 지닌 임윤지당. 주체적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돌아와 여성 문인을 모은 김금원. 현모양처라는 말에 가려진 예술인 신사임당. 다른 나라에까지 시와 이름을 알린 허난설헌.

외모나 인격 아닌, 노력과 능력으로 수식한 조선 여성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름조차 남지 않았으나 분명 작은 희망을 놓지 않았을 여성들이 뒤를 지켜준다. 작가는 ‘옛날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란다’며 ‘내 섣부른 바람과는 달리 그날은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기억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남의 나라와 슬픈 천명, 잃어버린 어린 때 동무와 홀로 침전함을 앞서 말했다. 시는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라는 문장으로 갈무리 된다. 시대를 건너온 작은 손들이 반복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악수를 청한다. 맞잡는 순간 용기와 희망이라는 빛이 번지며 몰입했던 이야기에서 빠져나온다. 친구와 함께 고통과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무대에 선다. 일상에서 실천한다. 하고 싶은 방식으로 세상에 ‘나’를 말한다. 부끄러워도 괜찮다. 부끄러움이 모여 손을 잡으면 함께여서 당당해지고, 그대로 멋진 존재가 된다. 쉽지 않겠지만 세상으로 한 발 짝 나오는 순간, 여러 갈래 길이 그대 앞에 놓일 것이다. 샛길로 가든, 돌아가든 모두 길을 걷는다. 쉬어도 괜찮다. 언제든지 다시 걸어갈 준비를 마쳤다면, 편한 옷을 입고 운동화 끈을 묶고 달려 나가자.

뛰어난 이야기에도 아쉬움이 있다. 석개의 외모를 과도하게 언급하는 서술이 불편했다. 기록을 그대로 좇아 아쉽다. 외형 묘사는 더는 흥미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이 칭찬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장계향이 시를 짓고 글 쓰는 것을 포기한 일화를 소개하며 ‘결심 한 번으로 쉽사리 포기’하고, ‘압력을 가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정말 그런가? 결심은 한 번이었을지언정 기록에 남지 않은 과정은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근본주의 성리학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고는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라는 작가의 질문을 다시 쓰고 싶다. ‘성리학이 득세하던 시절이었기에 꿈을 포기 당했다.’ 살림과 결혼이라는 책임이 개인적 성취보다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야말로 옛이야기다. 책 표지의 고운 빛깔 치마에 가려진 빛나는 가능성이 그날도, 오늘도 펼쳐지고 있다. 이 책과 비교하며 작가의 또 다른 책, 《소년, 어른이 되다》도 읽어보길 권한다. 소녀들의 이중 장벽과 달리 동시대 일곱 명의 소년이 ‘마주한 벽이 무엇인지’와 함께 그들이 ‘어떻게 그 벽을 넘어 어른이 되었는지’를 읽어가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리라.

한명숙(봄내중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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