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춘천 여행사 배승태 대표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불의에 함께 저항하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슬픔에 함께 연민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바빠서 일 것이고, 때로는 그런 일들이 너무 멀리서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가 서울에서 살 때는 확실히 그랬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타자였고, 대개의 사건 또한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 웬만한 타인의 슬픔은 내 것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기쁨도 마찬가지. 춘천의 경우는 확실히 달랐다. 어느 동네서 사고라도 났다 하면 아는 사람이라도 섞여 있지 않을까 싶어 불안했고, 반대로 누군가의 경사는 금방 내 방의 알전구가 하나 더 켜진 듯 밝아왔다.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공동구매를 통한 수익 200만원을 강원도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는 배승태 씨의 이야기. 춘천시민언론협동조합 《춘천사람들》(이하 춘사) 조합원이라면 대부분 배승태란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농가의 작물을 소비자와 연결하고 명절이면 LA갈비나 전을 만들어 싼값에 파(나눔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필자에게도 감동이 잔물결 쳤고 그를 어서 만나고 싶어졌다. 세상엔 더 크게, 더 자주 봉사하거나 나눔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을 테지만 말한 대로 그에 대한 관심은 춘사라는 가까운 거리감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춘천 여행사 배승태 대표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어요. 초·중·고를 경복궁 쪽에서 다녔지요. 아버지께서 경복궁 안에서 토속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셔서 8남매나 됐지만 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고요. 저는 공부는 좀 등한시하고 기계체조, 등산 등 운동을 좋아했어요. 1985년 한림대 중국어과에 입학하면서 그때부터 춘천사람이 된 거예요.”

그런데 1962년생인 배승태가 한림대에 입학한 해가 1985년도라 하면 고등학교 졸업 연도를 감안하면 약 4년 정도의 간극이 보인다. 이에 대해 묻자 배승태는 인생에 있어서의 다소 별스러운 경험을 털어놓는데, 듣다 보니 현재의 배승태하고도 오버랩되는 부분이 보인다.

“원래는 81학번으로 서울에 있는 동양공전에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 저는 좀 놀기 좋아했는데 친구들은 노는 친구, 공부하는 친구, 운동하는 친구 다양했어요. 그때 고등학교 친구들 중 의식있는 친구들 따라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 들어갔지요. 제가 특별히 의식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요. 그랬다가 김대중, 김영삼이 있는 신한민주당에 들어가 강동지구당 청년대표를 했어요. 그때 지역구 의원이 김동규 의원이었는데 전국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했던 사람 중 한 분일 거예요.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금방 실망했지요. 뭔가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정의롭고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생각했는데 똑같은 거예요. 다들 자기 욕심 차리고. 그래서 선거 뒤에 나와서 다시 시험 봐 들어온 게 춘천 한림대인 거죠.”

그렇다고 부모님과 7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두고 춘천에 정착하게 된 배경이 설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보통 하는 질문을 던졌다. 

“연애죠. 대학교 때 춘천 아가씨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는데 양쪽의 반대가 심했어요. 다 헤어지라는 거죠. 그래서 여자친구를 설득해서 동거를 시작했지요. 1학년 때요. 그때부터 집에서 일체의 지원이 끊기고 할 수 없이 휴학하고 돈을 벌어야 했어요. 명동에 나가 의류노점상을 했는데 잘 되는 거예요. 다다구리라고. 그게 뭐냐하면 골라 골라, 잡아 잡아, 골라잡아 반값! 그런 거요. 워낙 잘되니까 시기도 받고 양아치도 꼬이고 그랬는데 싸움으론 또 잘 안 지고….”

늦깎이로 다시 들어간 대학을 여자친구와 살기 위해 휴학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그의 인생유전이 달라진다. 1989년 약사동에 풍물시장이 조성되고 명동 상인들이 이전하게 되는데 그 상인 중에 배승태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20대에 대학생인 배승태는 제 몫의 좌판을 얻는 대신 풍물시장의 번영회장을 맡게 된다. 1991년 결혼과 1992년 (겨우) 대학을 졸업하면서도 번영회장직을 1996년까지 내리 4번 하게 되는데, 신망이 있었던 것일까. 배승태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이권에 대한 다툼, 관계자들끼리의 갈등 등 빤히 보이는 드라마도 궁금했다.

“직선제로 4번을 한 거예요. 제가 신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또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아마 상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예요. 다들 절박했거든요. 저도 사명감이 깊은 사람은 아닌데 일을 좋아했어요. 맹목적으로요. 여기 시장을 활성화시켜야겠단 그런 욕망이 있었죠. 시청과도, 상인들하고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해야 했어요.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적이 생기진 않나요?) 적이라기 보단 항상 이해관계에 있으니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늘 있죠. 그게 총무하고 상근직인데 첫해는 월 30만 원 받고 마지막 년도 회장할 땐 60만 원 받았어요. 조그만 좌판에서 빵을 구어내도 400만 원씩 벌 때거든요. 가끔 자리 달라고 뇌물 건네는 경우도 있지만 일절 받지 않았어요. 대신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면 소주 마시면서 방법을 찾아주긴 했죠. 결산하고 남는 게 있으면 똑같이 상인들하고 나눴어요. 단체에 돈이 쌓이면 싸움 난단 말을 하도 들어서. (돈에 대해선 확실한 양심이 있었나봐요?) 양심이 있는 게 아니라 철이 없었어요. 지원 끊었던 아버지가 결혼할 때 딱 3천만 원 주셨는데, 아버지를 믿기도 했고요. 잘못 큰 거죠. 정 궁하면 재고로 있던 옷 들고 1단지 2단지 가서 다다구리 했어요. 한번은 정말로 쌀이 떨어졌는데 당시 삼천동 동장하시던 분이 쌀 두 가마니를 보내줘서 잘 버틴 적도 있었죠. 그때 고마움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어요.”

 춘천발전포럼과 함께 봉사활동  

풍물시장 번영회장 일, 저소득층명절구호품 납품에 관한 사업, 사람이 죽고 다치고, 매년 고소 고발이 난무했던 소양제 난장을 맡아 6년간 진행한 이야기, 국민생활관에서 예식장을 운영하여 성공하고 망한 이야기, 서울 가서 자동차 매연저감장치 영업한 이야기, 그리고 이혼 등. 배승태의 인터뷰 녹취록은 A4로 80쪽이 넘는다. 약사동의 풍물시장이나 소양제 난장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기억을 올곧이 신뢰하진 않더라도 관계자 몇 명의 인터뷰를 모아 종합하면 좋은 사료가 될 거란 생각이다. 지면 관계상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금번 인터뷰의 주목적으로 옮긴다. 춘천사람들 조합원이 될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

“ 《춘천사람들》이 만들어지고 그다음 해일 거예요. 5노트(5NOTE) 사장이 좋은 게 있다고 가입하라고 했어요. 가입하고 보니까 저한텐 이게 행운인 거예요. 큰 부자는 없고 다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 같은데 착하고 봉사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도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인데 여긴 좀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달라요. 순수하신 분도 많고, 본받을 만한 분들도 많고요. 자연스럽게 교류가 시작됐죠. (그게 봉사로 이어진 건가요?) 코로나19가 왔잖아요. 매출이 반 이상 떨어지고 주중엔 거의 일이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더라고요. 제가 여태까지 바쁘고 시끄럽게 살아왔는데, 두 딸과 사위들이 독실한 크리스찬인데 부끄럽게 살면 안 되겠단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손녀에게도 떳떳한 할아버지가 돼야겠단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이제 춘사의 봉사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거죠.”

그런 봉사는 명절에 LA갈비 판매와 판로가 어려운 농가의 농작물을 소비자와 이어주는 일로 이어진다. 그리고 며칠 전 그 수익금의 기부 소식을 춘사 단톡방에서 공유하기에 이른다. 혹시 돈이 많은 사람일까.

“보증금 3천500만 원에 월 50만 원 하는 월세 살아요. 딸들이 실손보험 대주고 저는 부양할 사람 없으니까 저만 먹고살면 되죠. 그런데 좋은 일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잖아요. 단톡방에 올리는 건 고민을 좀 했어요. 그런데 공동구매 형식의 모금은 앞으로도 더 활성화되면 좋겠단 생각이 든 거죠. 올해에도 또 할거니까요. 처음부터 판매해서 이문을 남기겠단 게 아니었거든요”.

한 인간을 두고 영화로 치면 <시민케인>이나 <라쇼몽> 쯤 될 것이다. 인터뷰에 대해 손사래 쳤던 배승태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풍물시장이나 소양제 난장을 포함해서 인간 배승태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더하면 입체적인 서사가 만들어질 수 있겠단 기대가 생긴다. 배승태의 마지막 말을 전하며 필자의 마지막 인터뷰 또한 마친다.

“여기가 처음엔 이름이 ‘배씨아저씨 쉼터’였어요. 이제 춘사 사람들이 오고 가며편히 들려서 차 마시고 쉬다 갈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어요."

조창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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