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독립, 통일로 완성해야
완전한 독립은 일제강점기 피해 해결부터

지난 21일,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피해자 안희수(93) 씨가 별세했다. 안 씨는 1944년 13살의 나이에 일본 도야마 군수공장 후지코시 회사로 동원돼 강제노역 피해를 봤다. 당시 일본인 교사가 “후지코시에 가면 상급학교에도 다닐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등 거짓말로 선동했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후지코시는 1945년 조선인 1천89명이 근무 중인 것으로 기록될 정도로 근로정신대를 가장 많이 동원한 기업이다. 안 씨는 어린 나이에 강제노동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느꼈고, 단 한 번도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생전에 진술했다. 

이에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지만, 일본 현지 법원은 2011년 최종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2013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2019년 2심 승소 후 대법원의 마지막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천시민이 찍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담장에 붙어있는 메모지

포기를 모르는 일본의 역사부정

지난 1일 일본은 니가타현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추천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동원 된 현장으로 지난 2019년 발간된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는 사도광산 관련 조선인 1천1백40명의 미불임금을 공탁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은 이러한 강제노동을 비롯한 ‘전체 역사’를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를 통해 강제노동을 부정하고, 철저하게 감췄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춘천사람들》에 여러 번 소개된 춘천지역 고등학생 연합동아리인 ‘날개짓’은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생각으로 2017년 공지천과 2019년 춘천여고에 소녀상을 시민들과 함께 세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역사기행, 성명서, 캠페인, 3·1운동 기념행사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알려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도 현재 진행형이다. 

103년 전, 춘천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

천도교 춘천 석영기 교구장에 따르면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부터 천도교는 자체적으로 전국 천도교도를 매회 100여 명 정도 모아 ‘보국안민’을 기치로 독립을 위한 지도자 양성교육을 했다고 한다. 춘천에서도 교인 몇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춘천, 양구, 인제 등에 전달하려다 체포된 천도교도 안상덕 역시 지도자 양성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독립선언서는 압수됐지만 춘천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3월 7일 춘천농업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자 일제는 현병, 경찰 등을 동원해 이를 막았다. 3월 15일 아침, 천도교와 기독교 신자들의 주도로 소양강변에 모인 춘천시민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 지도자 윤도순 등이 체포됐으나 멈추지 않고, 3월 28일 당시 장날을 기해 또다시 만세시위를 진행한다. 석 교구장은 천도교도인 허현은 일본 헌병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후 4월 2일까지 춘천의 만세시위가 계속됐다. 

석 교구장에 따르면 3월 28일 이후, 천도교는 지도부 4명이 체포되는 등, 의병에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해 왔기 때문에 일제의 타겟이 되어 명맥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석교구장은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각각의 인권을 존중하고, 차별을 금지해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 등이 통일로 이어져 완전한 독립을 완성하는 것이 3·1 운동을 기념하며 생각해봐야 할 현재적 의미다”라고 말했다. 

한편, 강원도는 도내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급격히 확산됨에 따라 ‘제103주년 3·1절 기념식’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유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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