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사봉’(le savon) 정진희 대표

인류 역사에서 비누의 첫 등장은 무려 기원전 2천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의 점토 유물 안에 비누와 유사한 재료가 담겨 있었고 산양 기름과 재를 섞어 비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비누(Soap)의 어원은 고대 로마에서 유래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사포(Sapo)라는 이름의 언덕에 제단을 만들고 양을 구워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어느 날 제사의 뒷정리를 맡은 사람이 재에 떨어진 기름 덩어리를 집에 가져가 물통에 넣으니 빨래가 잘된다는 걸 발견했다. 이후 로마인들은 재가 섞인 기름 덩어리를 사포라고 부르며, 그동안 사용하던 ‘곰삭은 오줌’ 대신 사용했다.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던 비누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위생과 질병 예방 효과를 가져와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다양한 피부질환으로 인해, 대량생산되는 비누보다 친환경 천연비누에 관심이 높아졌다. 춘천의 먹거리로 비누를 만들어 주목받고 있는 ‘르사봉’의 정진희(37) 대표를 소개한다.

Q. 연구소에서 일했다던데, 창업 이전의 삶이 궁금하다.  

춘천에서 나고 자라 동부초·봉의여중·유봉여고·강원대 생물자원과학부와 대학원에서 식물자원응용과학을 전공했어요. 2011년 졸업 후 서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서 당뇨 억제 기능성 쌀 ‘슈퍼홍미’로 알려진 류수노 교수 연구팀에서 쌀 품종 육종 연구조교로 2년간 근무했죠. 그러다 잠시 일을 멈추고 긴 여행을 다녀온 후 춘천 바이오벤처타운의 미생물배양업체에서 종균관리 및 품질관리 연구원으로 5년여 일했습니다. 

Q. 긴 여행이 궁금하다. 창업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말이다.

서른이 되자 답답한 연구실 밖 세상이 궁금해졌어요. 머리와 가슴을 환기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와인농장에서 포도를 따거나 카페 알바라도 하며 여행하려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2014년에 프랑스로 떠났어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포도 따기, 카페 알바도 한국과 다르게 전문성을 요구하는 등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알바를 얻기 힘들었어요. 

오로지 쉼과 여행을 위해 낯선 곳에 온 외국인 청년들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 한 교수님의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다녀야지 무릎이 떨릴 때 가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모든 계획을 접어버리고 그저 쉬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를 경험했습니다. 리옹 홈스테이에서 만난 프랑스 부부로부터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유를 지향하는 삶의 자세를 배웠고, 보르도의 와인농장에서는 프랑스인들의 장인정신과 노동환경의 차이가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걸 배웠어요. 특히 포도 수확에도 와인 가문과 아주 오랫동안 일해온 스페인 노동자들을 데려와 정성껏 수확하는 걸 보고 감동 받았어요. 문화강국에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또 1790년 화학자 니콜라스 르블랑에 의해 본격적으로 비누를 보급 시킨 나라답게 수많은 비누가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창업을 생각조차 안 했기에 그저 흥미롭게만 보았어요.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무의식 속에 영감과 에너지로 자라 천연비누를 만드는 마음가짐 등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어요. 때문에 브랜드 이름도 프랑스말로 비누를 뜻하는 ‘르사봉’(le savon)으로 지었습니다.

Q. 다시 연구소로 돌아갔다. 창업에 나선 계기는 무엇인가?

말한 것처럼 당시에는 창업에 대한 생각이 없었어요. 서울보다는 자연이 살아 있는 고향 춘천에서 살고 싶었고 할 수 있는 게 연구원뿐 이었어요.(웃음) 그래서 바이오벤처타운의 수질 정화를 위한 친환경 미생물 공급 기업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결혼도 하고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 열이 나고 온몸이 가렵고 얼굴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 증상이 발병했어요. 정말 고통스러웠죠. 약물치료 등으로 나아지지 않자 주치의가 천연소재의 세안제·입욕제 등을 권했어요.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알아본 후, 서울 잠실의 유명한 아로마 천연비누 공방에 찾아가 직접 천연비누와 샴푸를 만들어 왔어요. 그런데 이튿날 바로 효과가 나타났어요. 거짓말처럼요. 그때부터 내가 화학제품이랑 맞지 않구나, 연구원이라는 직장 환경이 나에게 안 맞는가 보다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번아웃도 찾아오며 남편에게 스트레스와 감정을 많이 쏟아냈는데 많이 참고 받아주던 남편은 휴식을 권했어요.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남편 덕분에 용기를 내어 퇴사하고 몸과 마음을 돌봤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결심했어요. 내 경험을 살려 천연비누로 창업을 하자고.

2019년 봄부터 서울을 오가며 비누·화장품·아로마테라피·천연생활용품(세제) 등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습니다. 이후 퇴직금을 종잣돈 삼아 공방 자리를 알아보던 중 근화동396이 문을 열고 첫 입주창업팀을 모집한다는 걸 마감 하루 전날에 알게 됐어요. 밤을 새워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했는데 정말 운 좋게 선정됐습니다.

춘천양조장의 막걸리로 만든 비누 ‘르뷰흐’  사진 제공=르사봉  

Q. 근화동396 졸업팀 중 단연 눈에 띈다. 어떻게 성장했나?

비누제조판매를 위한 관련 법, 브랜딩까지 배움과 할 일이 정말 많았어요. 처음에는 클래스 위주로 하다가 2020년 후반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서면에서 나는 메밀을 재료로 ‘봉마땅’(세안용)과 ‘본뉘’(샤워용) 등 메밀비누 2종을 만들며 ‘로컬’에 눈을 떴습니다. 후원자 60여 명의 체험반응이 정말 좋아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메밀비누 2종은 ‘르사봉’이 만든 고유의 제품명을 가진 첫 제품이었기에 정말 소중합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역의 천연재료를 탐색했는데 마침 춘천양조장에서 춘천막걸리로 비누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왔어요. 다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2021년 봄, 춘천막걸리로 만든 비누 ‘르뷰흐’를 선보였습니다. 메밀비누는 후원자가 춘천 중심이었다면 막걸리비누는 타 지역 사람들도 펀딩에 참여하는 등 더 폭넓은 반응을 얻었죠. 이후 주방용 천연비누인 ‘라베셀’도 출시했습니다. 

지난해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역의 자연환경, 문화적 자산을 소재로 창의성과 혁신을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지역 가치 창업가를 지원하는 로컬크리에이터로 선정됐어요. 지역의 재료를 사용하여 제품 출시와 판매까지 이어진 성과를 통해 로컬창업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확립했다는 과분한 평을 받았어요. 덕분에 제조실, 포장실, 부자재 보관실, 재료 보관실, 세척실 등을 갖추고 일반 화장품 제조 판매 허가를 받아 천연비누 연구·제조·클래스·판매까지 모든 시스템을 완성하게 됐습니다.

천연 샴푸와 주방세제     사진 제공=르사봉

최근에는 춘천의 ‘물’을 주제로 로컬크리에이터들과 협업하여 춘천기념품키트를 제작했어요. ‘르사봉’은 ‘감자 아일랜드’(우두동)의 감자 맥주로 만든 맥주비누 ‘치어스’와 ‘미스터부엉이 커피로스터즈’(운교동)에서 로스팅한 커피로 만든 커피비누 ‘오 카페’를 새로 선보였습니다.

또 지역·장인·소상공인·창작자의 콘텐츠를 소개하는 서울의 ‘연남방앗간’ 서울역점이 진행한 기획팝업 <강원 : 겨울의 감각>에 초청되어 춘천의 비누를 널리 알렸어요.

Q. 천연비누 특히 지역의 먹거리로 만든 비누는 어떤 장점이 있나?

우선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지역의 바른 먹거리로 만드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또 일반 비누와 달리 경화제·방부제(산화방지제)·화학계면활성제를 넣지 않고 100% 생분해되는 천연숙성비누로서 천연계면활성제와 보습제가 함유되어 있기에 피부를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친환경 포장용기도 도입할 겁니다. 습기와 산소에 약한 천연비누 특성상 코팅지가 1차 포장재로 사용되지만 콩기름 코팅지나 재활용이 가능한 포장재로 변경할 거예요. 우선 주방용 비누 ‘라베셀’을 재활용이 가능한 종이상자로 교체했습니다.

Q.로컬창업에 관심있는 청년들에게 하고픈 말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많은 관심이 부담스럽고 전문가도 아니라서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느낀 바를 말하자면, 처음에는 지역의 재료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몸을 돌보며 내가 사는 지역과 환경으로 자연스레 관심이 가면서 춘천의 자원이 눈에 들어왔어요. 나의 니즈와 지역의 자원을 잘 연결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힘든 과정이었지만 제품이 나오고 좋은 평가를 받게 되니 보람이 정말 큽니다. 춘천은 예술가·물·산·먹거리 등 자원이 많아요. 큰 기업은 없지만 지혜를 모으고 협업을 한다면 청년들이 로컬크리에이터로서 도전할 만한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Q. ‘르사봉’이 가장 중요하게 삼는 건 무엇인가?

좋은 재료입니다. ‘바른 씻을 거리’는 믿을 수 있는 재료에서 나와요. 그래서 우리 지역의 먹거리를 재료로 삼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먹거리만큼 믿을 수 있는 재료가 없겠죠. 앞으로도 이 원칙을 꼭 지켜가며, 누군가의 하루 시작과 끝을, 바른 먹거리로 만든 바른 씻을 거리로 함께 하겠습니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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