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류인석(柳麟錫, 1842~1915)은 조선 말기의 의병대장이자 존화양이(尊華攘夷)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실천한 유학자이다.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화서학파는 조선말 한국 유학 사상사의 한 지점을 차지하는 학파이며, 의암 류인석은 이 화서학파의 대종장(大宗匠)이었다.

‘이산구곡(尼山九曲)’은 가평 설악면 우읍산 선인봉 아래 선바위인 입석(立石)을 일곡(一曲)으로 하여 춘천 남면 좌방산 서남쪽 아래 홍천강 오지소(吾止沼)를 구곡(九曲)으로 하는, 북한강과 홍천강 내에 있는 아홉 곳의 자연경관을 가리킨다. 습재연구소는 2013년 여름 남면 가정리 이장 유연훈과 남면사무소의 도움을 받아서 두 차례 답사하고 ‘이산구곡’의 위치를 비정한 바 있다.

허준구 (문학박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이산(尼山)’은 남면 가정리에 있으며, ‘두니산(斗尼山)’을 줄여 부른 것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亮紇)이 부인 안씨(顔氏)와 공자를 기도하여 얻었다고 하는 산이 ‘이구산’인 점을 감안(勘案)할 때, 즉 가정리 소재 두니산이 태산북두와 같은 공자를 모셨다는 뜻으로 붙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의암은 1906년 실제로 두니산 아래에 공자는 만세의 스승이라는 뜻의 만세사(萬世祠)를 건립하고, 동일시기에 주일당에서 간행한 『화동사합편강목』 및 그 판목을 이곳에 보관하였다. 

의암이 해외 의병의 거점인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떠나기 직전인 1907년에 당숙 항와 류중악과 함께 고향 산천과 공부하고자 다녔던 물길을 답사하고서 ‘이산구곡’을 비정(比定)하고 시로 남긴 것이기에, 시에는 유학의 도(道)와 사악한 세상에 대한 우려가 자연경관에 투영되어 드러난다. 

‘이산구곡’은 서문 시가 없고 발문 시 한 편이 붙어있어 총 10편으로 구성되었다. 『의암집』에 근거하여 구곡의 위치와 특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일곡(一曲) 가평군 설악면 우읍산(禹揖山, 속칭 우럽산) 선인봉 아래 선바위인 입석(立石) 

이곡(二曲) 홍천강[녹효강綠驍江]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바위 소룡암(巢龍巖)

삼곡(三曲) 홍천강을 거슬러 몇 리를 올라간 지점에 있는 전위탄(戰危灘)

사곡(四曲) 오금산(吾琴山) 앞쪽 홍천강에 있는 연못인 요취담(繞翠潭)

오곡(五曲) 장락산 곁 홍천강 내 연못인 부연(釜淵)

육곡(六曲) ‘기봉강역홍무의관(箕封疆域洪武衣冠)’ 글자가 새겨진 바위인 홍무벽(洪武壁)

칠곡(七曲) 의암 류인석 낚시하고 노닐던 가정리 앞 홍천강 내 못인 비령담(飛靈潭)

팔곡(八曲) 좌방산 자락이 홍천강으로 내려온 선바위인 비도암(賁道巖)

구곡(九曲) 홍천강 천근암(일명 배바위) 아래에 있는 못인 오지소(吾止沼)

일곡 입석(立石)이 있는 가평군 설악면은 의암 류인석의 스승이자 당숙이었던 성재 류중교가 한포서사(漢浦書舍)를 연 곳이면서 의암이 성재를 스승으로 모시며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한포서사로 들어가는 입구 표석으로 여길 수 있는 입석을 이산구곡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일곡 입석을 제외한 8곳이 홍천강과 연계되어 있고, 구곡(九曲) 오지소(吾止沼)는 천근암(天根巖, 일명 배바위)이 자리한 곳에 있는 못이다. 천근암은 구곡(九曲)의 근원이 되는 바위이자 유교의 뿌리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남면 가정리를 찾았던 선비가 이곳을 떠나갈 때면 마지막 이별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이곳에서 시를 지어 이별의 정감을 나누었다.

의암은 구곡을 모두 다니며 이름을 지어 비정하고 여기에 어울리는 시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발문(跋文) 시를 다음과 같이 읊조리며 국내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九曲詠歸江上天(구곡영귀강상천)    강가 하늘에 구곡을 읊조리고 돌아와 

徐趨理瑟聖祠前(서추리슬성사전)    만세사 앞에 천천히 나아가 거문고 타네  

願言來泰壽斯道(원언래태수사도)    바라건대 우리의 도[斯道]를 길이 전하여

有屹尼山靑萬年(유흘니산청만년)    우뚝한 이산(尼山)이 만세까지 푸르기를

의암은 당숙 항와 류중악과 함께 이산구곡을 비정하고 시를 지었다. 항와 류중악은 의암이 떠나고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농우(農牛)를 의병에게 내주고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을 도왔던 인물이며 의암과 함께 중암 김평묵과 성재 류중교에게 배우고 화서학파의 주요학설을 체계화하는 것에 공헌하였다. 의암은 가정리 두니산에 세웠던 만세사를 항와 류중악에게 맡기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을 만큼 두 사람은 끈끈한 관계였다.

시의 3~4구절에 ‘우리의 도[斯道]를 길이 전하여 우뚝한 이산(尼山)이 만세까지 푸르기를’ 바란 것은 항와 류중악에게 의암이 남긴 바람이었다. 이 바람은 아직도 우리네 가슴 속에 꺼질 수 없는 등불과 같다. 비록 청평댐 건설로 9곡 중 수평적 경관은 눈으로 확인 불가능하였지만, 그 나라를 걱정하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자는 뜻은 끊이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영원하리라.

허준구(문학박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습재연구소는 2013년 여름 남면 가정리 이장 유연훈과 남면사무소의 도움을 받아서 두 차례 답사하고 ‘이산구곡’의 위치를 비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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