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부수는 말 /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은폐된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구체적인 서사를 배우는 일은 비명을 언어화하는 작업이다. 비명 속에서 말을 찾고 고통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갈 때 ‘고통의 연대’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22쪽 [고통]

2022년, 자랑스러운 선진국 대한민국의 도심 한복판에서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스러져갔다. 행정안전부가 참사 후, 단 하루 만에 취한 조치는 ‘참사’를 ‘사건’으로 ‘피해자’를 ‘사망자’로 명명한 것이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은폐, 축소의 유구한 전통은 ‘권력의 크기에 따라 제 고통을 더 말하고 타인의 고통을 덜 듣는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말하고, “여기서 그렇게 죽었단 말이야?”라고 지껄인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증거 한다. 공포스런 기시감. [주최도 없이] [놀다가 죽은 젊은이들]은 [수학여행을 가다가][사고로 죽은 학생들]과 함께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 연민 없는 확신은 죄의식 없는 혐오와 폭력이 되어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고통스럽다. 

언어는 정치의 장이며 정치는 언어의 장이다. 공적 발화를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억울함을 번역할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위치에 따라 자신들의 억울함을 ‘공정’이라는 개념으로 번역하는 동시에 타인의 억울함을 무능력의 대가로 취급한다. 누구의 억울함을 번역할 것인가! - 117쪽 [억울함] 

광화문에서, 서울역에서 아무리 천막농성을 해도 ‘시민의 출근길’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장애인들의 목소리는 비장애인들에게 백색소음처럼 들린다. 방해하지 않던 백색소음이 출근길에 등장하면 비로소 소음으로 다가온다. 불편하지 않고 알아가는 진실은 없다. 세상은 놔두면 저절로 나빠진다. 가장 낮은 곳의 현실을 기본값으로 두어야 한다. 익숙한 ‘정상성’에 균열을 내고 고통에 연대할 때, 마침내 아름다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 

팬데믹 초기 질병관리청의 공식 브리핑 단어 중 ‘깜깜이 환자’는 시각장애인들의 지적으로 ‘감염경로 불명’으로 변경되었다. ‘유모차’가 ‘유아차’로, ‘폐경’이 ‘완경’으로 ‘성적 수치심’이 ‘성적 불쾌감’으로 바뀌는 사소한 언어들의 분투는 한 뼘 더 자란 우리 사회의 인권을 말해준다. 권력은 말할 기회가 너무 많고, 누군가는 말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류재량(광장서적 부사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