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무렵》 
황석영/문학동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어머니 역할을 도맡아 어머니상의 대표 격인 여배우가 드라마 속에서 한 이야기이다. 《해질 무렵》은 내가 무언가라도 누리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뒤로 하고 택한 책이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추천의 메시지에 속고 말았다. 한달음에 완독한 책치고는 재미와 감동이 넘칠 만큼은 아니었다. 훈훈하면서도 풋풋한 감정을 기대한 내게 심심한 슬픔만을 보태주었다. 털어낼 수 없는 늦가을의 참담한 사고로 무거워진 마음의 짐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무렵이었다.

접점 없는 두 세계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얼개를 맞추어 가며 읽느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60대 성공한 건축가 ‘박민우’와 연극연출가이자 극작가인 서른을 앞둔 ‘정우희’. 이 둘의 시선으로 각각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강연을 마친 박민우는 정우희로부터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받아 들고 잊고 살았던 ‘차순아’를 회상하며 산동네 달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달골의 재명이 형네 가족과 국숫집 차순아와의 이야기는 어릴 적 보았던 시대극 드라마의 장면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였다. 구두닦이 아이들을 관리하던 재명이네 가족의 이야기는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의 소재였으며 국숫집의 어여쁜 딸인 차순아는 또래 아이들의 마음속에 첫사랑인 여학생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반대하는 연극 일을 하고자 가족과 연을 끊은 정우희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병행하면서 5천원짜리 티셔츠 두 장과 만 원짜리 청바지 하나로 봄부터 가을까지 나야 했다. 고시원과 반지하 방으로 옮겨 다녀야 했던 정우희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없는 자에게는 척박한 세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우희와 박민우의 접점은 없는 듯 보였지만 이야기에 빠져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그들에게 희미한 그리움을 안겨주고 떠난 두 사람이 있었다. 박민우의 첫사랑 차순아와 정우희의 곁을 맴돌며 사랑을 표현한 그녀의 아들 김민우는 그들이 살던 세상에 의해 그 세상을 등져버렸다. 그들은 마지막까지도 마음속에 박민우와 정우희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박민우와 정우희의 마음에도 두 사람이 깊은 석양처럼 붉게 스며들어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의 욕망은 그런 가치들 가운데 남길 것만 걸러내고 대부분을 자기 위주로 변형시키거나 폐기 처분해버린다. 조금 남겨두었던 것들마저 마치 오래전에 소비했던 낡은 물건처럼 또 다른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힌다. 건물을 무엇으로 짓느냐고? 결국은 돈과 권력이 결정한다. 그런 것들이 결정한 기억만 형상화되어 오래 남는다.       -본문 중에서-  

누가 누구를 위로해 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 속에서 괜한 책을 선택해 느끼고 싶지 않았던 먹먹한 심연의 감정들을 꾹 참아내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돈과 권력, 사람을 이기는 ‘무기’가 아닌 정의를 위해 쓰이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춘사톡톡’*의 한해 독서 여정은 황석영 작가의 《해질 무렵》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간 ‘춘사톡톡’의 살림을 맡아 묵묵히 이끌어주신 집행부에 톡톡 회원님들을 대신해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안수정 (춘사톡톡 회원)  

*춘사톡톡 : 춘천 시민이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독서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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