祝詩(축시) /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여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직 아픈 사람이 있어 내 청단풍잎 같은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줄 수 있으면 좋으리. 문득 겨울을 맞은 나무처럼 삶의 지붕이 쓰라린 사람일 때엔 낮은 데서 빛나는 종소리 한 줌의 무게로 다가가 그의 가슴을 쓰다듬을 수 있으면 좋으리.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깊어진 음성으로 먼 눈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으리. 손금이 마주치는 순간의 평화와 안식을 얹어줄 수 있으면 좋으리. 

그러나 아아, 그 아프고 쓰라린 사람이 영원히 나여서 단 하루라도 돌아가 그의 손 아래 내 이마와 어깨 눕힐 수 있으면 좋으리. 멀고 깊은 눈나라에 고요히 갇힐 수 있으면 좋으리.


컨텐츠보다 이름만 조낸 유명할 것 같은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하길 “비참한 사람이란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오독과 문맹이 횡행하는 시절이어서 나는 요즘 이러한  A/S까지 감행하여야 한다. 

쇼의 이 말은, 이도 저도 아닌 시간과 상태의 지리멸렬과, 불필요한 생각과 시간의 과잉을 동시에 야유하는 뜻으로 읽힌다. 정말이지 자신의 처지와 생각이 어떤 것인지 규명할 수 ‘없는’ 상태란 얼마나 비참한 거신가. 역설적으로, 그 상태에 주저앉아 그것만을 붙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란 또 얼마나 비참한 거신가. 

시대를 두고 도처에 범람하는 “속 빈 말들의 범람”에 대해 언급했더니, 오히려 ‘그 말에 대해 또 말을 만들고 싶어하는’ 몇몇 심리들을 읽었다. 이해한다. 읽지 않고 듣지 않고 말부터 하고 싶어 하는 “성급과 나태(카프카)”가 뭐 비단 SNS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닐 테니까. 낮은 수위의 일반론을 이야기해도 다 자기 이야기처럼 해석되는 ‘피해망상 증후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고단하다, 생각과 시간이 과잉한 분들과 한세상 더불어 자빠지는 거, 한세상 더불어 오물을 뒤집어 쓰는 거.

부디 당부컨대, 지킬 놈은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신념과 애정을 보여주고, 바꿀 놈은 바꿀 세상에 대해 철학과 희망을 보여주라. 책보다 고지서를 더 자주 읽어야 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여유”가 있어서 ‘인문학적 선택’을 하겠나. 이미지밖에 없는 정치라면 차라리 시인의 몫이 더 많지 않겠나. 

조금만 더 서로 고급해지자. 뭔 말인지 시바, 가방 끈 긴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이 황야를 달린다. 다 조낸 쌀자루 한 포대보다 영양가 없는 말들이다. 조까지들 마시라, 원래부터 관군은 백성을 잡고, 백성은 외세를 잡았다. 백성이 정답이다. 시바.

 

류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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