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이기홍 등 4인의 학덕 기리기 위해 건립
이기홍, 송시열의 노론 학통 처음으로 춘천에 전수

춘천 서면 금산리에 가면 ‘백운동모현비(白雲洞慕賢碑)’가 있다. 백운동이란 서면 현암리 감와리골을 가리키는데, 조선 후기 학자인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가 이곳에 은거하면서 춘천지역의 유생을 가르쳤다. 1949년 춘천 출신 유학자인 김영하가 이를 기념해 세운 비가 ‘백운동모현비’다.

조선 숙종 때인 1674년에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은 서면 현암리에 유배를 당한 뒤 조카인 김창흡·김창협 형제와 사위 이만성, 동문 이기홍과 함께 강학을 통해 지역 유림들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김창협·김창흡·이만성·이기홍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모현비’. 현재는 춘천 서면 금산리 애니고등학교 옆에 있다.

이들 중 김수항의 동문인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1641∼1708)은 우암 송시열의 직계 제자인데, 그의 호인 ‘직재’에서 ‘직(直)’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것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정직일 뿐이다”라는 주자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665년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회덕에 있는 송시열을 찾아 사제 관계를 맺은 이후 기사환국과 갑술옥사 등을 겪으면서 춘천과 가평에서 은거하기도 했고, 함경도 회령에서 귀양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기홍은 은거지인 춘천과 유배지인 회령, 그리고 부임지인 통천과 청풍 등에서 느낀 현실을 109수의 한시로 남겼는데, 특히 1675년 전후 춘천과 가평에 은거할 때 안빈낙도의 삶과 일상의 내면의식을 〈천곡8경(泉谷八景)〉에 담았다. 

그는 조선 중기 이후 춘천지역에서 강학 활동을 통해 송시열의 노론 학통을 처음으로 전수한 인물로 서면 현암리에 송시열을 기리는 서원을 지으려 했지만,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1727년 춘천부사 성진령이 서원의 상량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춘수영당(春睡影堂)을 지었는데, 영당이 철거된 뒤 1902년 ‘모현단’이 건립됐고 1949년에 단비(壇碑)가 세워졌다.

그의 세 동생 중 기범(箕範)은 남산면 방하리에, 기부(箕傳)는 동면 지내리에, 기인(箕仁)은 양평에 살았다. 현재 이기홍의 전주이씨 덕양군파 후손들은 그들의 선대 묘소와 함께 춘천 사북면 원평리, 동면 가산리, 남산면 강촌리·방하리에 거주하고 있다. 그가 지은 한시 <화악청설華岳晴雪>에서 눈 내린 화악산의 고즈넉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華山爽氣雪初晴 화악산에 눈 그치니 상쾌한 기분 

萬壑千巖一色橫 온 골짜기 모든 바위 하얗게 가로질렀네

忽有斜陽驢背客 홀연히 석양에 나귀 등 타고 가는 나그네  

知應石逕訪梅行 응당 매화를 찾아 돌길을 가는 것이겠지

한희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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