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흥우(언론협동조합 춘천사람들 이사장)

1494년 열아홉 살에 조선의 열 번째 왕이 된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2년 만에 신하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가 폭군이 된 이유로는 흔히 그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억울한 죽음이 거론된다. 그에 대한 기록인 〈연산군일기〉가 그를 왕위에서 쫓아낸 자들이 기록한 것이니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연산군의 자아가 올곧게 형성되지 못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궐 주변의 민가를 부수고 사냥터로 삼는가 하면 놀기 좋게 궁궐을 넓히느라 공사를 크게 벌여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고갈시켰다. 게다가 조선팔도에서 아름다운 처녀들을 징발해 ‘흥청興淸’으로 삼아 그야말로 ‘흥청망청’ 놀았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그의 빗나간 성격은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버림받은 어머니의 고통에 대한 강한 연민은 아버지에 대한 강한 혐오로 이어지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의 기행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자기 할아버지에 대해 “학살자”라고 말하고, 자기 집안에 대해 “사람들 피 위에 세워진 집안”이라고 절규하기까지 한 청년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한 청년의 불행한 개인사가 아닐 것이다. 1996년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로 구속·기소된 학살자 전두환에게 대법원은 1997년 4월 17일 무기징역과 추징금 2천205억 원의 형을 확정했지만, 그는 8개월 만인 그해 12월 ‘국민대통합’의 명분으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인 2021년 11월, 90세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내내 호화생활을 누리면서 922억 원의 추징금을 끝까지 이행하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숨겼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그의 손자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다. 가정부와 경호원 명의로 유령회사를 설립해 돈을 세탁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 돈으로 전두환의 아들들은 밖으로는 사업가와 목사를 행세하면서 안으로는 학살자인 아버지를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세뇌했다.

정치권과 검찰은 또다시 뒷북을 치며 추징금을 환수할 방안을 찾겠다는 둥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겠다는 둥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자금을 파헤쳐 미납된 추징금을 환수할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형이 확정된 지 자그마치 25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갖은 핑계를 대며 방임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것 역시 반성 없는 죄과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결과다. 하물며 사과하지 않는 전범국가를 용서하고 미래의 동반자라고 추켜세우는 이 정부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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