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흥우 이사장 

그녀의 부모는 금융가의 투기꾼이었다. 미신에 깊이 빠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홉 살이 되자 유명한 점쟁이에게 그녀를 데려갔다. 점쟁이는 그녀가 훗날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녀는 사교계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다. 그리고 점쟁이의 예언대로 마침내 최고 권력자의 옆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최고 권력자의 힘을 빌려 온갖 특권을 행사하며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패션과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그녀가 엉뚱한 곳에 세금을 낭비한다고 비난했다. 그녀에 대한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자는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는 두 번의 유산을 경험한 뒤 그 어떤 남자하고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이쯤 소개하면 혹시 ‘용산’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18세기 중엽 당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情婦로 알려진 퐁파두르 후작부인(Marquise de Pompadour)에 대한 이야기다.

갑자기 300년 전의 프랑스 후작 부인을 소환한 까닭은 얼마 전 있었던 작은 ‘소란騷亂’ 때문이다. 효자1동 주민자치회와 춘천민예총문학협회가 협약을 맺고 약사천 담벼락에 건 시화 현수막 한 점이 일방적으로 철거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일단의 작가들이 효자1동을 항의 방문했다. 효자1동 동장은 정치색이 짙은 시라는 누군가의 민원에 따른 조치였다며, 예산을 들여 작품 사용료를 낸 이상 문제가 없다며 원상복구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무지와 오만함의 극치가 아닌가 싶다.

<후작 부인>이란 제목의 해당 시는 열 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시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베갯머리파”였다는 마담 퐁파두르에 ‘용산’의 퍼스트레이디를 빗댄 것이다. 19세기 역사가들은 마담 퐁파두르가 루이 15세를 압도한 것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당대의 파리 시민들은 그녀의 낭비벽을 비난했다. 그녀의 주도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영국·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인 ‘7년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자 그녀에 대한 비난은 극에 달했다.

그녀의 적들은 심지어 그녀의 묘비명을 “20년은 처녀로, 15년은 창부로, 7년은 뚜쟁이로 보낸 여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지만, 이에 대한 반론은 만만치 않다. 그런 비난과 적개심은 평민 주제에 어느 날 갑자기 국왕의 최측근으로 끼어든 데 대한 귀족들의 선동에 대중들이 현혹된 탓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예술적 안목이 매우 뛰어났고, 문화·예술·학문을 후원했으며, 패션·미술·연극·도자기·보석 등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대였다.

18세기 유럽 문학계의 최고 유명인사이자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볼테르는 그녀가 만 43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한없이 슬퍼하며 그녀를 “올바른 영혼과 정의로운 가슴의 소유자”라고 애도했다고 한다. 이런 고매한 사람에게 접대부논란을 비롯해 허위논문·허위경력 논란, 주가조작에 무속인 논란까지 끊임없이 논란을 ‘Yuji’하는 사람을 빗대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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