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은 누가 먼저, 신식결혼을 먼저 한 사람

양복은 언제 누가 처음으로 입기 시작했을까? 차상찬에 의하면, 일본 유학생 손봉구가 유력하다. 또, “그저 무명천으로 만든 병정이 입던 속바지 저고리를 양복이거니 하고 사서 입었다”라는 표현 속에서 당시 매국 행각에 앞장섰던 일진회 회원들에 대해 질타하는 차상찬의 숨은 뜻을 엿볼 수 있다.

유혁노 씨 말에 의하면 자기가 1881년(고종18) 1월에 서재필·이규완·신응희·정난교·조병교 등과 같이 일본에 최초로 유학을 갔었다. 그 일행 중 한 사람이 남보다 앞서서 상투 머리를 하고 양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해 박정양·홍영식·어윤중·조병직·조병호 등 소위 12수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손붕구라는 이가 일본 모 학교에 다니며 단발에 양복을 입고 수신사들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랑캐 옷을 입은 사람은 가까이할 수 없다는 조병호의 수행원 고영희의 핑계로 만남을 거절당한 사실이 당시 모 씨의 수기에 있는 것을 보면 유혁노 씨가 말하는 사람보다 이 손붕구 씨가 먼저 양복을 입은 것이 사실이다. 손붕구 씨 이전에도 누가 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 알기에는 이름있는 사람으로는 손붕구 씨가 제일 먼저인 것 같다. 

그리고 온전한 국민으로는 조선에서 양복을 입고 지방까지 돌아다니며 개회 연설을 한 1904년 일진회 회원들이다. 그때 일진회 회원 중에는 신사로 양복을 입은 이도 있었지만, 지방의 회원들은 실은 양복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그저 무명천(솜)으로 만든 병정(군인)이 입던 속바지 저고리를 양복이거니 하고 사서 입었다. 겨울에도 밀짚모자에 다래나무 지팡이를 집고 다니며 의기양양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한편 웃긴 일 같지만은 그때의 군수나 관찰사들은 그 벌거숭이 양복쟁이들을 보고 무서워 벌벌 떨었다.

결혼 풍습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은 결혼 예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그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신식 결혼도 근래에는 여러 가지 의식이 있다. 기독교에는 기독교식이 있고, 천도교에는 천도교식이 있고, 기타 개인들에게도 별도의 의식이 있다. 심지어 야외에서 결혼식까지 한 일이 있다. 즉 여러 의식에 대하여 모두 말하는 것이 옳지만, 조선에서 소위 신식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시작되기는 기독교 교회에서 한 까닭에 여기에서는 먼저 기독교 의식으로 결혼 한 사람을 말하려고 한다. 조선에 기독교가 유입된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그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행한 것은 지금(1928년)으로부터 38년 전 2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중략)

그때만 하여도 일반에서는 아직 구식에 젖어 있었다. 서양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습관을 모두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위 절충식으로 하여 기도, 주례사 등은 기독교식으로 하고, 혼례복은 구식의 한복을 입었다.

그러다가 그 뒤 1892년 가을에 와서 이화학당 학생 황몌례 씨와 배재학당 학생 박 모(성명 미상) 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것은 온전히 기독교식으로 여자는 드레스에 면사포를 쓰는 예복을 입고, 남자도 프록코트 정장에 모자를 썼으며, 남녀 간에 예물 교환까지 하였다. 이것이 말하자면 기독교식으로서의 완전한 신식 결혼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 남녀가 조선에서 최초로 신식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 이 글은 1928년 12월 발행한 《별건곤》 통권 16·17합 호 ‘각계 각면 제일 먼저 한 사람’의 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차상찬 읽기 시민모임’에서 현대어로 윤문했다.

차상찬 읽기 시민모임  (대표 박제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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