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조직된 한국 최초의 청년회…을사늑약 때 해산됐다 1916년 재조직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의 고향 엡워쓰(Epworth)에서 착안

《동아일보》, 1920년 7월 5일 기사 편집.
조선일보》, 1924년 7월 5일 기사 편집.

 

1920년 6월 19일 오후 8시. 춘천예배당에서 춘천엡웟청년회가 조직됐다. 청년회를 발기한 사람은 유한익·홍종숙·지달원 등이었다.

춘천엡웟청년회는 청년들의 지덕체를 기르고 상호 친선을 도모하는 동시에 교회 밖 청년들에 대한 선교를 활동목표로 정했다. 창립총회에서는 회장에 홍종숙, 부회장에 지달원을 선출하고, 종교부·자선부·문학부·사회부·운동부를 두어 각각의 부서장으로 최태곤·최태진·김형식·최태경·방희원을 선임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5일). 《매일신보》 1916년 9월 14일 기사를 보면 그해 9월 이전에 춘천엡웟청년회가 이미 조직됐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아마도 활동이 지지부진해 유명무실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춘천엡웟청년회 발기인 중 유한익은 남감리회 목사로서 1919년 8월 결성된 ‘애국단 강원도단’에 관여하고 있었고, 홍종숙은 신흥우·김활란·박동완·박희도·유각경·홍병덕 등과 함께 1926년 2월 ‘기독교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지달원은 춘천 정명여학당 교사였다.

여기서 ‘엡웟’이란 용어는 대체로 생소할 것 같다. ‘엡웟Epworth’은 감리교회의 설립자인 영국인 존 웨슬리(J. Wesley)의 출생지로서 한자로는 ‘의법懿法’으로 표기했다. 엡웟청년회는 1889년 5월 15일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시작됐다. 한국의 엡웟청년회는 감리회 제13회 한국선교연회 때, 조이스 감독(Bishop I.W. Joyce)이 조직을 결심하고, 조원시(G.H. Jones) 선교사를 통해 각 지방과 개별 교회에 조직을 추진했다. 1897년 5월 5일, 정동교회 대표 노병선, 제물포교회 대표 김기범, 상동교회 대표 이은승, 평양교회 대표 노블(W.A. Noble)과 페인(J.O. Paine) 등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해 한국기독교 최초의 청년회를 설립했다.

1905년 상동교회 청년회원인 전덕기·정순만 등이 을사늑약에 항의하며 무력시위를 벌이자 친일인사였던 해리스는 1906년 한국선교연회에서 엡웟청년회 해산시켰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인 1916년 조선연회에서 이익모·이하영·손정도·김유순 등의 청원으로 엡웟청년회 재조직이 결정되자 전국적으로 청년회가 다시 활발하게 조직되기 시작했다. 3·1혁명 이듬해인 1920년 말까지 미감리회 소속의 엡웟청년회는 전국 13개 지역에 2천여 명의 회원을 보유했고, 남감리회 소속 엡웟청년회도 전국에 72개 청년회를 조직해 회원이 2천여 명에 달했다.

《조선일보》 1924년 7월 5일 기사를 보면, 강원도 청년단체는 71개였고 이에 속한 회원은 5천281명에 달했는데, 엡웟청년회 조직은 14개에 회원은 632명이었다. 이 중 춘천웹웟청년회 회원이 150명으로 도내 전체 회원의 25%를 차지했다.

1925년 9월 남감리회 웹웟청년회 전국연합회가 결성되었고, 1929년 6월에는 북감리회 웹웟청년회 전국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이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해 현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전신이 됐다. 이에 따라 1931년 7월 창립된 ‘조선엡웟청년회연합회’는 1933년까지 전국 26개 지역에 177개 청년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인 1938년 10월 27일 엡웟청년회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엡웟청년회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교육이었다. 유치원·야학·주일학교 등에서 부녀자와 아동의 문맹 퇴치를 위해 한글을 가르치고 체육대회나 연극공연 등을 통한 계몽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1920년대 중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농촌운동에도 앞장섰는데,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전흥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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